워싱턴 디씨는 온전히 걷기에 너무 넓었다. 쓸데없이 웅장한 링컨기념관에서 의회도서관까지는 약 4킬로미터. 길이 모두 공원이어서 걷기에 나쁘지는 않았는데, 더웠다. 딸아이의 입이 대빨만큼 나오기 시작했다. 사춘기 소녀만큼 무서운 게 또 있을까. 돌아가는 길을 다시 걷자고 하면 전쟁을 치러야 한다. 마침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구글맵을 검색하니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가 곧 도착한다. 아차. 지갑에 현금이 없다. 버스표가 따로 있는지, 따로 있다면 어디서 살 수 있는지도 몰랐다. 신용카드가 되려나.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버스가 왔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타고 보자.
그런데. 이거. 언젠가 봤던 장면이다.
1995년. 서울 신림9동.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던 날들이었다. 밤새도록 소설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다운 받아서 보고 아침에 잠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다가 깨면 그 꿈을 계속 꾸려고 다시 눈을 감았다. 배가 고프면 일어나 라면을 끓였다. 라면마저 떨어졌다. 지갑에 돈이 떨어진 건 벌써 며칠 전이다. 서랍을 뒤집어 동전들을 긁어모았다. 백 원짜리 하나. 십 원짜리 몇 개. 삼백 원은 있어야 구멍가게에서 라면이라도 하나 살 수 있다.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찾으려면 10분은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포기. 수돗물을 한 그릇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다. 꿈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 잠이 깼다. 반지하 자취방에도 낮에는 손바닥만 한 햇볕이 드는데, 하필 얼굴을 바로 비췄다. 햇빛을 피해 몸을 돌렸다. 잠이 완전히 깨기 전에 다시 삼겹살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잠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꼬로록. 잠이 깨니 더 배가 고프다.
츄리닝에 쓰레빠를 신고 큰길까지 털래털래 걸어갔다. 내가 가진 현금카드는 농협이지만 이 동네에는 조흥은행 지급기만 있다. 수수료 천 원을 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돈을 찾아서 제육볶음이라도 먹어야 살겠다. 단골 분식점의 메뉴를 상상하며 삑삑삑 단추를 눌렀다. 이런. 잔액이 부족하다. 통장에는 만 원 하고도 구백 원이 있지만, 수수료 천 원을 빼면 만 원이 되지 않는다. 조흥은행 현금지급기에서는 인출할 수가 없었다.
돈이 없으니 더 격렬하게 배가 고팠다. 뱃속의 회충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연락할 만한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있을 시간이다. 이 꼬라지를 하고 알바를 하던 가게 사장님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자주 가던 분식집에서 외상을 해 볼까? 내 얼굴을 알아볼까? 아니다. 농협에 가면 돈을 찾을 수 있다. 직접 가면 수수료가 없을 것이다. 통장이 어디 있을까? 집을 발칵 뒤집어서 찾아냈다. 시간이 없다. 곧 은행이 문을 닫힌다. 큰길로 뛰어 내려갔다.
농협까지 걸으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버스를 타야 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백삼십 원. 버스비는 이백오십 원이다. 이를 어쩌나. 뛸까? 힘이 없다. 정류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버스비를 빌려볼까. 영락없이 거지꼴이다. 나 같아도 안 빌려준다.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타고 보자.
버스 기사 옆에 서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버스 문이 닫혔다. 출발했다. 천천히 돈을 셌다. 아니 세는 척했다. 하나 둘 셋 넷. 백삼십 원. 두 번 세도 백삼십 원. 아무리 세도 백삼십 원. 기사님. 버스기사는 운전을 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가 버스를 타고 보니까 돈이 모자라네요. 죄송합니다. 기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겠습니다. 거울에 기사의 입이 비쳤다. 학생, 어디까지 가요? 네? 아, 저기, 지하철역이요. 그냥 뒤로 가서 앉아요. 제가 백삼십 원 있는데 그거라도 넣을까요? 됐어요. 다음에는 돈 가지고 다녀요. 거울 속 기사는 돈을 세는 척했던 얄팍한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씩 웃었다.
당시만 해도 버스를 타다 보면 요금 때문에 승객과 기사가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나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기사님은 츄리닝을 입고 양말도 없이 구두를 신고 머리에는 새집이 삐죽삐죽 올라온 나를 불쌍히 여겼을지도 모른다. 대학가를 운전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돈 없는 자취생쯤으로 생각했겠지. 나이로 보면 노숙자는 아닐 것이고, 기사님은 나만한 자식이 집에 있을지도 몰랐다.
공짜 버스를 타고 농협에 가서 무사히 만 원을 찾았다. 그 만 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분식집에 가서 이천삼백 원짜리 제육볶음을 먹고, 공짜로 공깃밥 하나를 더 얻어먹고, 라면 세 개와 소주 한 병을 사서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나에게 서울은 그런 도시였고, 내 마음속 서울은 지금도 그렇다. 돈이 없어도 마음이 편한 곳. 요금이 없는 학생을 보면 버스 기사가 슬쩍 눈을 감아 주는 곳.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은 아마 정반대가 아닐까. 돈이 있어도 불안한 곳.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가 무척이나 꺼려지는 곳. ‘그런 사람들’이 없거나, 아니면 ‘그런 사람들’을 내가 모르는 곳.
서울이나 워싱턴이나 버스의 풍경은 익숙하다. 하지만 멋진 모뉴먼트보다 이 버스가 워싱턴을 기억하는 나의 기념사진이 될 거다.
이십오 년 전 그때처럼 나는 버스 기사 옆에서 우물쭈물 망설였다. 이제 나는 늙고, 기사는 레게 머리를 하고 있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워싱턴이다. 아이 해브 노 캐시. 크레디트 카드 어베일러블? 레게 머리를 한 힙한 버스기사는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노.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뭐라 뭐라 말했다. 내리라는 말이구나. 아임 쏘리. 아 윌 겟 오프 더 버스. 레게 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노노. 저스트 겟 인. 그리고 계속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미국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대화를 많이 한다. 사람을 부를 때 마치 개를 부르는 것처럼 손가락을 당긴다. 내가 보기엔 가라는 건지, 오라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레게 기사는 밖에 있는 딸아이와 와이프까지 그냥 타라고 손짓을 한 것이다.
땡큐 쏘 머치. 아임 쏘리. 잇 이즈 더 퍼스트 타임 인 워싱턴 디씨. 아이 돈 노 하우 투 페이 더 버스 페어. 버스 기사 옆에서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했다. 레게 기사는 매우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말했다. 해브 어 나이스 투어. 디씨 이스 더 모스트 뷰티플 시티 인 더 유에스.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거다. 거울에 비친 레게 기사는 웃고 있었다. 이십오 년 전 그때가 정확하게 다시 떠올랐다. 그렇지. 서울만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미국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이제 워싱턴은 윤석열 대통령이 다녀간 백악관이나, 뜬금없이 거대한 링컨기념관, 트럼피들이 점거했던 의사당의 도시가 아니다. 워싱턴은 나에게, 버스를 공짜로 태워준 도시, 레게머리를 한 힙한 버스기사로 기억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