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가 시즌1보다 재밌는 드라마가 있었나?
(미국일기 #28)
알람이 울린다. 6시 20분이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온다. 살짝 실눈을 떠 보니 창문이 눈부시다. 미국 해는 왜 이렇게 일찍 뜨는 거냐. 그럴 리가.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몸을 뒤척거린다. 왼쪽은 벽이다. 오른쪽은 다른 사람이 누워있다. 다리 쪽으로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서 침대를 벗어난다. 180도를 돌아 나가면 복도. 1초 2초 3초를 걸어가면 화장실. 문을 열면 오른쪽에 변기가 있다.
드디어. 아침에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비로소. 여기가 집이구나. 마침내. 나는 지금 일상을 살고 있구나.
일상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탐색’이 없는 시간들이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어디쯤에 휴대폰이 있는지, 방문을 나가면 어느 쪽이 화장실인지, 계란 프라이를 먹으려면 어디에 있는 프라이팬을 사용해야 하고, 식용유는 어디에 있는지, 그냥 알아야 한다. ‘알아내면’ 일상이 아니다. 청소하기 싫을 수는 있지만, 청소기가 어디에 있는지 잠시 생각해야 하면 그건 일상이 아니다.
일상의 반대말은 여행이다.
여행을 가면 낯설다. 모든 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이라는 걸 해야 한다. 일상에서는 필요 없는 시간이다. 식당을 검색해야 하고, 갈 곳을 찾아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하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 냉장고에 물이 있었나? 아니 냉장고는 어디 있지? 호텔 조식을 먹을까, 나가서 브런치를 먹을까? 탐색하고 선택해야 한다.
여행은 참으로 번잡스러운 법이지만, 대부분 여행을 좋아한다. 배낭여행은 필수고, 유럽 여행은 로망이고, 순례길 여행은 버킷리스트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크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에 느끼는 기분 좋은 텐션. 새로운 풍경,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들. 여행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번잡스러운 것을 일부러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여행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여행의 정의가 그렇다. 어디를 '갔다가 오는 게' 여행이다. 평생 하라고 하면 여행은 형벌이 된다. 누구에게는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여행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원대한 감각을 가지기는 어렵다. 대부분 텐션이 높은 여행이 끝나면 포근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2023년 1월 2일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JFK공항에 도착했다. 대략 예정된 시간은 4년. 애매한 시간이다. 4년은 다소 긴 여행일까, 조금 짧은 이민일까. 한국의 짐을 모두 버릴 수도 없고, 그대로 놔두고 갔다 올 수도 없다. 미국에서 집을 사야 할까. 렌트를 해야 할까. 한국에서 덜커덕 회사를 그만둔 나는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할까. 아니면 열심히 글을 쓰기만 하면 되는 걸까.
한국에서 가져온 부엌살림은 3인용 전기밥통과 비상용 수저 세 벌, 코펠 한 세트가 전부였다. 프라이팬이나 냄비, 접시 같은 건 숙소에 구비돼 있었지만, 한국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 밥그릇 국그릇은 없었다. 웍도 없고 커피 내리는 도구도 없다. 6개월 뒤에 한국에서 짐이 도착할 예정이다. 어디까지 사야 하고, 어디까지 마련하고 살아야 하나. 이케아(미국에서는 아이케아)에 가서 대접을 몇 개 사고, 아마존에서 드리퍼를 주문했다. 사춘기 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책상과 의자도 샀다. 나머지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만 마련했다.
20대에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게 당연했지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매일매일 여행지 콘도에서 밥을 해 먹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여행하는 마음으로 6개월을 버텼다.
그리고 지난달 앞으로 적어도 2년 동안 거주할 집을 구했고, 한국에서 거대한 짐더미가 도착했다. 한국에서 쓰던 웍이 가장 반가웠고, 김치냉장고와 텔레비전은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미국에 가져올 계획에 전혀 없었던 피아노와 짐들이 뒤섞이면서 딸려온 가지치기용 사다리는 황당했지만 즐거웠다. 신혼 때부터 쓰던 오디오는 여전히 작동이 잘 됐다. 여기서 4년을 쓰고 버릴 생각을 하니 벌써 속이 쓰리다.
집이 작아서 짐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미국 집은 지하 창고가 넓었다. 물건들이 제자리를 잡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손톱깎이는 식당 서랍장 첫 번째 서랍. 알러지 약은 거실장 세 번째 서랍. 국수 채반은 가스레인지 아래 오른쪽. 우산은… 잠깐. 우산을 어디에 놔뒀지? 이제 잠에서 깨면 여기가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 없이 움직인다.
작은 방이 하나 남아서 책상과 컴퓨터를 갖다 놨다. 작고 지저분하지만 앞으로 내 작업 공간이다. 보기만 해도 글을 막 써질 것 같…지만 막상 그렇지는 않다. 미국에 있는 동안 소설을 두 권 더 쓰는 게 애초 계획이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적응하느라, 여기저기 다니느라, 이 핑계 저 핑계 많았다. 글 쓰는 방까지 생긴 마당에 이제 탓할 게 없다. 큰일이다.
지금까지 6개월은 파일럿과 시즌1이었다. 엉겁결에 시작해서 꾸역꾸역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를 살아 냈다. 이제 시즌2가 시작됐다. 잠깐. 시즌2가 더 재밌는 드라마가 있었나? 아주 가끔 있다. CSI라스베가스가 그랬고, 왕좌의 게임이나 덱스터도 점점 더 좋아졌다. 영화의 경우 대부나 백투더퓨처가 생각이 난다.
그렇다면 나의 미국 생활 시즌2는? 당연히 모른다. 살아 봐야 알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