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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Jul 17. 2023

미국에서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유일한 방법

백종원도 모르는 황금 레시피

(미국일기 #25)

처음에 미국에 가지고 올 수 있는 건 이민 가방 여섯 개가 전부였다. 컨테이너 짐이 도착할 때까지 6개월 동안 먹고 입고 생활할 물건을 알뜰하게 챙겨야 했다. 우선순위는 옷, 컴퓨터, 미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울 것 같은 식재료 등의 순서였다. 저울을 사서 수시로 무게를 달았다. 짐을 넣었다 빼고, 옮기고 바꾸는 작업은 엄청난 지적, 육체적 노동이었다.


평소에도 김장은 필요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그 노력을 들일 바에는 사 먹는 게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김치는 역시 종갓집 아니겠나. 같이 사는 여성분은 정반대다. 대대적으로 (물론 장모님이) 김장을 해서 꾹꾹 눌러 담은 김치 박스를 냉장고에 가득 채워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사람이다. 당연히 짐을 싸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와이프는 작년 초겨울 김장할 때 챙겨 놓은 김치 두 포기를 굳이 이민 가방에 챙겼다.


미국에도 김치 많이 팔아.

그거랑 같아?

비행기에서 발효가 돼서 터질 수도 있어.

진공 포장 하면 돼.

국물 새면 끝장인데.


옆에서 깐족거리는 내 말을 무시하고 와이프는 아예 플라스틱 김치통을 이민 가방에 넣었다.


김치는 무사했다. 그리고 나의 낙관적인 전망과 달리 미국 음식은 쓰레기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는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가 됐다. 달고 짜고 느끼하고 기름진 미국 음식에 지친 혀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건 언제나 김치였다. 김치찌개, 김칫국, 김치볶음밥, 김치고등어조림, 그리고 김치삼겹살.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핥아먹었다.


아예 김치를 담가 볼까?

에헤이. 마트에 김치 많다니까.

맛있을까?

요즘은 공장 김치가 더 맛있어.


한인 마트에서 산 김치는 실망스러웠다. 배추가 미묘하게 흐물흐물했다. 익었다기보다는 삭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가격까지 생각하면 절대로 사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그래 담그자. 옛날 유학생들은 고춧가루도 없이 소금하고 양배추로 백김치를 만들어 먹었다고 하지 않나. 우리에게는 고춧가루도 있고, 젓갈과 새우젓 정도는 한인 마트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다. 기왕 하는 김에 수육도? 아서라. 그건 나중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집 근처 마트에 배추가 없다. 배추는 영어로 나파 캐비지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인기 있는 채소는 아닌 것 같았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만 김치에는 배추가 꼭 있어야 한다. 기다렸다.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버스와 배추는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고 하 않았나. 그리고 어느 날 배추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배추에 소금을 뿌려서 밤새 절였다. 소금을 뿌리면 배추 속 수분이 밖으로 배출된다. 이걸 삼투압이라고 한다. 배추가 절여지는 원리다. 나름 식품을 전공한 와이프는 배운 사람답게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삼투압을 안다고 배추가 맛있게 절여지지는 않다. 아침에 본 배추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어라? 이놈들이 왜 숨이 죽지 않았지? 소금이 부족한가? 소금을 왕창 뿌리고 다시 저녁까지 기다렸다.


무채를 썰고 풀을 쒔다. 고춧가루와 젓갈을 왕창 넣어 양념을 섞었다. 하얀 배추에 빨갛게 색을 입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럴듯했다. 자투리 배추로 겉절이도 비볐다. 김치가 익을 때까지 연명할 식량이다. 김치는 통에 넣어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처음 담가본 김치. 보기에는 제법 그럴듯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주가 지났다. 이제 꺼내 볼까? 기대감에 가슴은 부풀었고, 손은 살짝 떨렸다.


응?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지?


김치에서 김치 맛이 나지 않았다. 양념과 배추가 따로 놀았다. 뭐가 부족한 거지? 겉절이는 먹을 만했는데 이상하네. 싱겁지는 않은데. 역시 미원을 넣었어야 하나. 요리의 완결은 MSG라고 하더니. 먹을 수는 있는데 신나지가 않다. 김치가 아니라 매운 샐러드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았다. 방법이 없다. 미국에서 김치는 사 먹는 게 합리적이다. 김치통 뚜껑을 닫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한동안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냉장고 깊숙이 숨어 있는 김치통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였더라? 아. 김치. 설마 그 사이에 맛있어질 리는 없겠지?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푹푹 삭혀서 찌개라도 끓여 먹어야 할까? 통을 열고 다시 맛을 봤다.


응?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매운 샐러드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김치가 됐다. 결국 김치는 시간의 음식이었다.


핵심은 시간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와 좋은 환경을 갖춰도 시간이 빠지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시간 언제나 기적을 만든다. 저 큰 샴푸 통을 언제 다 쓰나 싶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소진하게 돼 있다. 언제 제대하나 싶어도 하루하루 살다 보면 병장도 달고 어느날 예비군이 된다. 콩만한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건 시간이 만들어주는 가장 경이로운 기적이다.


테니스가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고 매일 땀을 흘리면 멋진 포핸드 스트로크를 할 수 있다. 도레미파로 시작해도 시간만 들인다면 언젠가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다. 적응은커녕 도망치고만 싶었던 미국 생활도 6개월이 지나 조금 살 만해 다.


물론 그 시간이 발효지 부패인지는 잘 구분해야 한다.


(맛있는) 김치 두 포기를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마음이 든든하다. 다음에는 꼭 수육을 같이 삶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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