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일본
“서류심사에 탈락하셨습니다.”
일본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매년 3달에 한 번씩 일 년에 총 4번에 걸쳐 뽑았으며, 경쟁률이 상당했다. 운이 좋은 경우 한 번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보통 한두 번은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나의 경우 3번의 낙방 후 4번째에 비자가 나왔다. 한두 번 만에 붙을 거라 예상했었는데 시간이 걸리자 초조해지고 짜증도 났다. 초반에 떨어졌을 때는 언어 공부도 좀 더하고 돈도 더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떨어지게 되자 차라리 모은 돈으로 서울로 올라가서 다른 일을 할까 생각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넣은 4번째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합격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힘겹게 얻어낸 워킹 홀리데이 비자와 함께 3번째 직장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외국생활 3년 계획 중 일본을 첫 번째로 정한 건 지리상으로도 가깝고 아시아권의 국가이기에 적응이 쉬울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일본에 도착해서는 먼저 어학원 등록을 했다. 언어를 배울 목적도 있었지만, 현지 생활의 적응과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어학원에는 인도, 중국, 독일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다들 초급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했기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타지의 낯섦과 외로움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오전에는 학원에 다니고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워킹 비자라는 것이 일하는 것도 가능했기에 돈을 벌면서 생활하기에 최고의 비자였다. 일본에 처음 온 유학생이나 나와 같이 워킹비자로 온 사람들이 일정 수준의 언어 능력이 되기 전까지 일하는 곳은 주로 한국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서빙이나 주방보조의 일을 한다. 처음 일을 한 곳은 도쿄 시내에 위치한 한국 삼겹살 식당이었다. 서빙과 계산대를 담당하는 홀 업무를 주로 맡았으며, 간혹 바쁠 때는 주방 보조 역할도 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학원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일본 생활 3개월이 지날 무렵 학원을 그만뒀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고 학원에 의존하지 않고도 현장에서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원을 그만둠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일본 가게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여러 곳의 가게 면접을 봤지만 서툰 일본어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들이댄 결과 운 좋게 젊은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장의 일본어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기대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무너졌다. 주문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국식당과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가끔 손님이 없을 때 사장과의 대화 정도가 전부였다.
가게 안의 업무는 사장이 주방을 맡고 내가 홀 전체를 담당하는 구조였는데 매일 혼자서 홀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한국 방식의 일반적인 청소라면 진공청소기를 사용하거나 빗자루와 밀대를 사용해서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사장의 지시로 나무로 된 바닥을 물수건으로 닦아야 했다. 청소 방법을 비롯한 일하는 방식도 정해진 것들이 많았는데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마치 군대에서 느꼈던 비합리적인 것들을 생각나게 했다. 군대에서는 걸레를 짜는 방법도 정해져 있었는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짜든 물기 없이 잘 짜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짜는 방법까지 정해서 그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구박을 주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일본 가게 아르바이트 현장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문화의 차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이지 않았던가.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들의 방식대로 맞춰서 일을 해 나갔다. 묵묵히 하다 보니 일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고 언어 실력도 조금씩 늘어갔다.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에는 구청이나 문화회관 등에서 주관하는 일본어 교실에 나갔다. 그곳에서는 무료 또는 소정의 참가비만 받고 일본어와 문화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이주민을 비롯한 유학생, 외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 외에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는데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을 사귈 수 있었다.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군과의 교류도 가능했다. 일본어 교실뿐만 아니라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커뮤니티 등을 열심히 찾아다닌 결과 한류를 좋아하는 동갑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한류보다는 한국어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와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 주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도 쌓았다.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던 친구는 언어뿐 아니라 일본 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실전 감각을 익힌 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고급 일본어를 구사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기에 사무직은 어려웠고 현장직 쪽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본은 아르바이트 급여도 높고 수요도 많아서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도 가능했다. 주변 친구 중 몇몇은 3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고수익을 올리는 친구도 있었다. 부럽기도 했지만, 그 당시 내 목적은 돈보다는 많은 경험을 하기 위함이 더 컸기에 흔들리지 않고 경험 위주의 생활을 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하게 된 일은 백화점이나 상가 같은 곳의 해체 작업이었다. 백화점의 매장이나 상가들이 가게 콘셉트를 바꾸거나 업종을 전환할 때 기존의 인테리어를 해체하는 일이었다. 주로 밤 시간대에 일을 시작해 새벽에 끝이 났다. 일이 고정적으로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한번 시작하면 같은 현장에서 일주일 정도 일을 했다. 밤과 새벽에 하는 일이라 생체 리듬이 깨지기 일쑤였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천장에서 나오는 석면과 마주하여 일이 마칠 때쯤에는 눈썹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새벽에 일이 끝나면 첫차를 기다리는 동안 허기도 달랠 겸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그 당시 밥과 같이 마셨던 생맥주는 인생 최고의 맥주로 기억되고 있다. 타지에서 고된 노동 후에 마시는 맥주 한잔이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새로 시작한 일이 고정적이지 않다 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생활비는 어떻게든 절약해서 산다 하지만 도쿄의 높은 월세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어쩔 수 없이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하게 되었는데 급하게 구한 탓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업장의 사장은 인터폴에도 등록된 전라도 출신의 조직 폭력배였고 그 장소는 일본의 야쿠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회의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결국, 어느 순간 사장은 행적을 감췄고 일한 급여를 받지 못했다. 그 일로 인해 방세를 내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일본에 처음 왔을 때 같이 룸메이트로 지낸 친구가 돈을 빌려줘서 해결할 수 있었다. 타지에서 힘들 때 그런 일을 당하다 보니 분하고 원망스러웠다. 상황이 급하다고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행동한 나 자신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외국에 나가면 현지 사람보다 그곳에서 오래 생활한 한국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중국 사람들의 경우는 외국에 나가면 서로서로 도와 상생하며 영향력을 넓혀 간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기존의 사람들이 새로 온 사람들에게 접근해 도와주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은 한국 회사의 일본 법인이었다.
이곳은 일본의 소프트뱅크 회사에 통신 중계기를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곳이었는데 워킹 비자가 완료될 시점에 회사로부터 직원 입사제의를 받았다. 주위에서는 일을 하고 안 하고는 차후의 문제이고 좋은 기회이니 무조건 취업 비자를 받아 놓으라고 했다. 취업비자를 사고파는 전문 중개인도 있었을 정도이니 좋은 기회인 것만은 확실했다. 절차를 알아보니 정직원이 될 경우 회사를 통해 3년의 체류가 가능한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타지에서 1년쯤 있다 보니 고향에 대한 향수병도 생겼고 원래의 계획대로 한국에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쉽게 결정이 되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회사와 주위의 권유를 만류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돌아갔다가 필요시에 다시 나온다는 계획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 향수병은 복귀와 함께 금세 사라졌고 다시 일본에 가려고 방법을 찾았으나 관광 비자 외에는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