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시리즈와 이승환, 그리고 《HUMAN》.
“그 사람이 보고 듣는 게, 그 사람이다.” 혹자가 그러던데, 얼추 동의한다.
취향의 주재료는 시간과 관심이니까. 예로 나만의 패션 철학을 갖기 위해선, 먼저 여러 매체를 구독하고 다양한 옷을 입어보는 수고로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해 취향만큼 한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기호란, 이승에 없다. 소개팅 첫 만남에 좋아하는 노래, 인생 드라마 등을 묻는 것도 그런 이유고.
소개팅 아니어도, 살다 보면 이따금 “좋아하는 드라마 있어?”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매회 눈물지은 드라마가 몇 편에, 요새도 종종 넷플릭스를 뒤적이는 나지만. 막상 대답하기 어렵다. (아무거나 말하긴 싫고) 나름 고민 끝에, 최근에서야 〈미생〉, 〈중쇄를 찍자!〉, 〈멜로가 체질〉, 그리고 〈응답하라〉 시리즈로 고정했다. 사람냄새 나는 작품이 좋아서. 죽고 죽이는, ‘기필코’ 복수해내고야 마는 빡센 전개는 개인 정서상 안 맞더라고.
하나같이 N차 시청했지만, 〈응답하라〉는 매력이 조금 다르다. 보통 드라마에는 OST란 이름 아래, 작품을 위해 만들어진 새 노래가 존재한다. 반면 〈응답하라〉는 제 이름처럼 당시의 명곡들을 장면 뒤에 고대로 소환한다. ‘디깅’이란 단어조차 없던 시절. 나는 주로 오디션이나 경연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주웠다. 한 곡이 마음에 와서 닿으면 그 가수의 노래를 마저 찾아 듣는 식이었다.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던 고등학생에게 〈응답하라〉는 대단히 속 편한 드라마이자 일종의 ‘스포티파이’였다. 양파, 서지원 같은 친숙한 이름부터 푸른하늘 등의 생면목 가수까지. 한 편을 맛있게 비우면 재생목록 수 곡이 채워졌다. 일거양득, 누워서 푸는 코랄까.
1997, 1994, 그리고 1988까지. 〈응답하라〉의 삼색 빛깔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흥행 성공과 '이승환' OST다. 순간 ‘이승환이 누구지?’ 생각했다면, 젊음의 증빙서류가 발급되었다. (청년 기준) 아무래도 부모님 세대 가수니까. 그의 데뷔 년도는 무려 1989년이다. 망하면 (음악) 접겠다는 포부로 낸 1집이 100만 장을 넘겼고 91년에 발매한 2집이 12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어서 3집, 대망의 4집까지 연달아 성공하며 이승환은 한국 대중음악 황금기의 대주주 중 한 명이 됐다. 다시 보니 〈응답하라〉와 이승환의 만남은 필연이다. 그의 목소리를 빼놓고는 90년대를 완벽히 조명할 수 없으니까. 모든 편에 흐르는 이승환의 미성은 고르게, 꾸준히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아련 촉촉한 고명이 되어.
1997이 가장 재밌었다. 그치만 1994가 좋다. 배우 취향도 있고 수록곡 탓이 크다. 중학생 때 이승환을 알았지만 대표곡 몇 개가 다였다. 드라마를 계기로 넓게 듣기 시작했다. 하던대로 한 곡, 한 앨범씩 주워가며. 시원이와 나정이, 덕선이의 불혹이 지나며 강산도 세 차례 변했다. 그런데 웬걸, 이승환은 여전히 현역이다. 혹자는 〈응답하라〉 2002, 2010이 방영해도 그의 노래가 수록될 거라던데. 맞는 말이다. 세대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수니까.
대개가 그렇듯 나 또한 ‘천일동안’으로 이승환을 알았다. 천일동안은 1995년 발매된 4집, 《HUMAN》의 선발 투수이자 타이틀곡이다. 처음엔 의아했다. 왜 타이틀을 최전방에 배치했을까. 드문 일은 아니지만 곡의 서사나 웅장함으로 볼 때, 첫 순서보단 후반부에 등장하는 게 흐름상 좋지 않을까 싶었다.
《HUMAN》에는 '한국 대중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이승환의 포부와 야망이 담겨있다. 팝을 연상시키는 고밀도의 사운드, 다채로운 장르에 대한 실험 정신, 각 곡의 완성도와 앨범 단위의 유기성까지 갖추며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큰 찬사를 받았다. 것도 그럴 것이 앨범 제작에 막대한 돈과 열정이 들어갔다고. 미국의 유명 스튜디오와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그래미 수상자인) 세계적인 프로듀서 '데이비드 캠벨'이 함께 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풍부한 사운드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 정량적으로도 표현 가능하다. 당시 정규 앨범 한 장의 제작비는 평균적으로 5천만 원 정도였다. 《HUMAN》의 제작비는 4억이다.
누가 그랬다. 《HUMAN》의 차별화된 소리를 느끼려면, 3집 끝 곡과 4집의 첫 곡(천일동안)을 이어 들으라고. 앞선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승환 사랑은 막학기 때 정점이었다. 인턴으로 4학년 1학기를 퉁치고 처음이자 마지막 휴학을 신청했다. 해보고 싶던 아르바이트도 할 겸, 졸업 전 내 시간도 가질 겸. 수 달이 금세 지났다. 코앞이 복학이었지만 아쉽기보단 설레었다. 알바 동료 중 동문이 있었는데, 영화 동아리 회장이랬다. 듣자마자 껴달라고 했다. 복학하면 동아리에 받아달라고.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미련 뚝뚝하던 차였다. 21년 2월이었다.
코로나가 심해져 결국 비대면 학기가 시작됐다. 나의 마지막 강의실은 동네 카페였다. 복학생의 꿈은 박살 났지만 위안거리는 있었다. 마지막 교양만큼은 원하는 수업으로 듣게 됐으니. 이름이 ‘대중음악의 이해’였을 거다. 아끼는 앨범 한 장을 골라 보고서를 제출하는 게 기말 과제였다. 뻔한 전개지만, 나는 《HUMAN》을 택했다. 주위에서 “요즘 뭐 듣냐” 물어보면 아직도 이 앨범을 추천한다. 그리고 농담처럼 말한다. 천일동안이 가장 별로라고. 그만큼 전곡이 좋다. 특히 아끼는 곡은 있다. 익숙한 작곡가의, 아는 맛이 듬뿍 담긴 두 곡. 김동률의 '다만', 유희열의 '변해가는 그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취향이 시간과 관심의 집약이라면, 순애의 주재료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모르긴 몰라도 오롯한 나의 소관은 아닐 것이다. 아릿한 우연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