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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라디오

by HONG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시점을 떠올리기 어렵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낮은 주파수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있다.

그 주파수는 언제부터 정돈된 문장과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되었다.

그 목소리는 어느새 내 안에서 작고 빨간 라디오의 형상을 취했다.


기분 좋은 햇살과 바람이 마음을 들뜨게 했던 어느 날,

산책길에 예쁘게 정돈된 튤립 몇 송이를 판매하고 있는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튤립은 금방 시들죠. 물을 자주 갈아줘야 하고, 햇빛이 잘 드는 창도 없죠.

혼자 사는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라디오가 켜진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꽃을 내려놓았다.

마치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가볍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라디오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흘러나왔다.

조용히 흘러나올 때도 있었고

가끔은 시끄러운 음악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버리기도 했다.

라디오에서 다시 멘트가 나온 것은 우산을 집어 들기 직전이었다.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다 젖은 흙냄새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네요, 이런 날에는 산책하지 않는 게 좋겠죠?

오늘은 집 안에서 조용히 쉬는 것을 권장합니다.

살짝 웃었다. 맞다. 오늘 같은 날 굳이 젖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들고 잠깐 멈춘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엄지 손가락이 닳을 것 마냥 액정 위를 맴돌고 있을 때쯤

-보낸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굳이 먼저 연락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결국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전송되지 않은 말들을 주워 삼켰다.


가끔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선택이 그 목소리를 통과한 후에야 결정되는 느낌이 들곤 했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 집 앞 마트에서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러 들렸다.

정육 코너 앞에서 신선한 고기가 눈에 띄어 멈춰 섰다.

예전엔 이걸로 종종 스테이크를 구워 먹기도 했는데, 최근 들어 손질이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괜히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정육코너 안쪽에서 고기를 정리하던 직원이 나를 힐끔 보다 별 뜻 없이 말을 걸었다.

"요즘엔 다들 바쁘니까 뭘 잘 안 해 드시더라고요, 그래도 주말이니까 한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


그 순간 라디오의 볼륨이 커졌다.

-요리는 아무래도 정성이 필요한 일이죠, 혼자 사는 사람에겐 다소 과할 수 있겠네요.

굳이 오늘 같은 휴일에 번거로운 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장바구니에 담으려던 손이 망설여지고,

그렇게 주춤한 손 끝을 따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이상한 갑갑함이 가슴 깊숙이 번져왔다.

정육코너 직원은 내 표정을 힐끔 바라보다 이내 다시 몸을 돌려 진열된 고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뭔가 해볼까 했었던 것 같은데.'

목이 뻣뻣해지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짧은 마음 하나조차도 겨우 몇 줄짜리 라디오 멘트에 덮어버렸다.

'주말이니까 한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

불과 몇 초 전까지, 내 생각도 점원의 말과 같았는데

지금은 감히 내가 가질 수 없는 말처럼 느껴지다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건 좀... 이상한데..."

내가 생각한 말이, 나의 입에서 다시 나오는 걸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말이 나랑 아무 상관없는 말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래 내 안에 나온 말들을 '라디오'로 듣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가만히 앉아 머릿속의 라디오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끔 마음이 힘들 때가 있죠, 그럴 때일수록 더 부지런히 움직여주는 게 좋아요.

"그만. 오늘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조용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무언가 멈춘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어쩐지 안도되는 기분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면 시력에 좋지 않죠, 불을 켜는 건 어떨까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나의 일부처럼 내 안에서 울려댔다.

그제야 알았다.

너무 오랫동안 내 생각을 '내가 아닌 말'처럼 듣고 살아온 결과겠지

그래서 이젠 내가 그만하자고 말해도, 나조차 스스로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닫힌 창문 사이로 햇빛이 커튼 너머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다 먹은 컵라면 용기와 술병이 제멋대로 테이블에 나뒹굴고 있었다.

머릿속 라디오를 꺼보려고 잔뜩 마셔댄 탓이었다.

평소 같으면 거실을 먼저 치웠을 텐데, 나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부엌에 갔다.

어쩐지 커피가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과음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지금 커피를 마시면 위가 아작 날 거예요,

수분섭취를 권장합니다. 그리고...

라디오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중간에 그 말을 끊기 위해 노력했다.

"됐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잠겨있는 목에서 작은 소리만 맴돌았다.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그만. 그만해"

라디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 어떤 말과 단상도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물을 끓였고, 머그잔에 커피를 천천히 부었다.

무슨 특별한 맛이 나는 것도 대단히 기분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조용해서 귀가 먹먹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멈추지 않는 라디오를 처음으로 멈춰 본 날이었다.

고요함을 뚫고 어쩐지 머릿속에서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라디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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