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던 나는 진로 방황을 정말 많이 했다.
공무원, 대기업, 대학원, 로스쿨, 방송국, 회계사 등등 문과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진로는 다 한 번씩 준비해 봤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방황의 수많은 선택지 중 대학 졸업이 다가오며 그래도 무언가 한 가지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 오고야 말았다.
하나의 길을 골라야 한다면
딱히 하고 싶은 직업도, 잘하는 것도 없던 나지만 그나마 관심 있는 것이 공연과 음악 분야였다.
콘서트, 뮤지컬, 노래, 춤 등 특정한 것을 깊이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공연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동요중창단을 했고, 고등학교 때는 연극 동아리를 했으며 대학교 때는 치어리더로 활동을 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재밌었고, 평소 춤추고 노래 부르고 것도 좋아했다. 한창 슈퍼스타k나 일반인이 오디션을 보는 방송 프로그램이 유행할 때 '가수를 해볼까?' 생각해 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졸업은 다가오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나마 관심 있는 공연 분야 쪽으로 일단 준비를 해보기로 했다. 그게 무엇이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공연/문화 업계에서 취미가 아닌 업으로 일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분야는 정했는데 도대체 어떤 직업이 있는지, 어떤 직무가 있는지 아는 게 없었다. 학창 시절 공연 동아리는 꾸준히 했지만 대학 전공도 이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인턴으로 체험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2학기 휴학하고 인턴 하는 것을 목표로 여름방학 때 채용사이트를 열심히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연 분야'라는 것이 굉장히 애매하고 나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인턴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채용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두었는데, 한 회사에서 '큐레이터'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아이들 단체견학이나 관람객이 오면 프로그램 설명을 진행하는 역할이었는데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내가 원했던 공연 분야였고, 또 다년간의 공연 동아리 경험으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자신 있었기에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했다.
일은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재밌고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말하는 큐레이터는 명칭만 큐레이터이지(미술 분야에서 말하는 그 큐레이터가 아니었다) 사실상 마케팅과 홍보 업무도 곁들여하는 애매한 직무였다. 낮은 페이도 고민이 되었다.
처음으로 카페나 식당 아르바이트가 아닌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본 경험이라 의미가 컸지만, 결국 인턴 3개월을 끝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휴학이 끝나고 학교에 복학 후, 또 여러 진로 고민을 하던 나는 일단 많이 들어서 익숙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명확한 로스쿨을 준비하기로 한다. 오랜 시간 너무 많은 진로고민에 지쳐있었는데 로스쿨은 그래도 리트, 내신, 영어 등 당장 준비해야 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내신과 영어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에 리트만 잘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법조인이 될 거야'라는 어떤 굳은 의지나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음이 흔들렸다. 리트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채용사이트를 계속 드나들며 공고를 확인하고, 특히 공연 분야와 연관성이 높은 방송국, 엔터 쪽 공고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결국 리트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고, 인서울 로스쿨 최종 면접까지 가긴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추합 7번을 받으며 불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졸업을 했다.
졸업은 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니 일단 리트를 다시 보기로 하고 로스쿨 재수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러면서 채용사이트는 여전히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공연기획사에서 공연기획자를 뽑는다는 채용공고를 보게 된다.
공연기획사가 뭐 하는 곳인지는 정확히 잘 몰랐지만, 그 공연기획사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한 곳이었고 마침 당시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의 드론쇼 등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났다.
"어? 뭔가 재밌겠는데?"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원서를 냈고, 서류합격을 해서 면접도 보러 갔다.
물론 부모님은 우려를 내비치셨다. 로스쿨 준비한다며 일단 졸업을 하더니 갑자기 공연기획사라니. 외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바라셨던 부모님의 예상 범주 안에 있는 일반적인 진로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은 다들 대기업에 취직하고 로스쿨 붙어서 공부하고 있는데, 내가 지금 제대로 된 결정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로스쿨 준비에는 어차피 1년이 걸렸고 회사를 다니면서 병행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플랜 B로 퇴근 후와 주말에 리트 공부를 병행하면서 회사를 다녀보기로 했다.
소규모 회사였기에 최종면접까지 빠르게 진행이 되었고, 그렇게 계획 없이 졸업했던 나는 졸업한 지 1달 만에 공연기획사로 첫 출근을 하게 된다.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공연 업계에서 일해보기'가 현실로 실현된 순간이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출근한 나에게 떨어진 첫 업무는 바로 자료조사였다. 당시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큰 행사의 개막식을 준비하고 있어서 각종 '개막식'을 자료조사하는 게 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출근 첫날부터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이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가장 기본적으로 봐야 하는 개막식이 '올림픽 개막식'이라고 해서 역대 올림픽 개막식들을 자료조사했는데 내가 여태까지 봤던 어떤 공연, 콘서트보다 너무 멋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면서 올림픽 개막식은 딱히 챙겨본 적이 없었는데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도 유튜브 짤로 봤다) 이렇게 멋진 것들이 있었다니 나에게는 정말 신세계였다.
이 외에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보조하기 위해 출장을 종종 갔는데 가는 출장마다 너무 재밌고 이런 행사들이 있었다니! 이런 공연들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했다.
업계 동향을 파악하라고 박람회도 출장을 보내주셨는데 박람회라는 것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고, 또 다양한 업체들도 만나고, 이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을 하게 되고, 직원 복지로 티켓을 받아서 다양한 공연과 페스티벌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때 봤던 공연들은 모두 내 인생 공연이 되었다.
내 예상대로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한다는 건 행복했고 인생이 풍부해진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있었다니 과장해서 말하면 대학교 때 술 먹고 놀고 여행 가는 거보다 더 재밌었다.
대학생 때 큐레이터로 인턴을 했던 것은 공연 업계 맛보기 느낌이었다면, 이 회사는 정말 공연/문화 업계의 정수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였고 출근하는 것이 정말 흥미롭고 재밌었다.
그래서 "그 회사에서 잘 일하고 있는가?" 한다면 대답은 "NO"이다.
수습 3개월이 지나고 그만두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맞았으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직무는 아니었다.
자료조사를 벗어나 본격적인 일들을 하나씩 해보면서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가 느껴졌다. 기획사는 크리에이티브가 중요한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얻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워라벨 좋은 회사에 들어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취미생활로 문화생활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처음으로 인생에 방향을 잡은 듯한 느낌이었다. 로스쿨은 접고 일반적인 회사의 사무직으로 취직하는데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또한, 예전에는 막연하게 '나는 공연 분야에 관심이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공연기획사에서 일하며 그 형태가 명확해졌다. 올림픽 개막식, 박람회, 문화공연, 페스티벌, 지역축제 등 다양한 이벤트들을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일이 맞는지는 머리로 고민할 게 아니라 부딪혀봐야 가장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걸 몸소 체감했다. 이후 또 취준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고생은 많이 했지만, 지금도 돌이켜보면 공연 업계에서 일해본 건 정말 감사하고, 후회 없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