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취하의 날

서류 한줄 누락의 나비효과

by 변호사 연덕

1. 2025년 봄, 서울남부지방법원 제4민사부는 다소 긴장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민사소송이었다. 원고는 건설업체 ㈜A플랜트, 피고는 우리를 포함한 다수의 발주처. 사건은 공사대금 청구에 관한 것이었고, 원고 측은 처음부터 모든 피고를 상대로 자신들의 대금을 지급하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우리는 이미 그 대금을 완납한 상태였기에 억울할 것도 없고 당황스러울 일도 없었다. 단지 기나긴 싸움이 지루할 뿐이었다.


2. 소송은 예상보다 훨씬 질기고 복잡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매 기일마다 성실하게 반박 자료를 제출하고, 원고 측의 과장된 산출 내역에 하나하나 대응했다. 진흙탕 싸움 같았지만 그 와중에도 흐름은 조금씩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2025년 4월의 어느 날, 그 사건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3. 그날, 원고 측 법무법인에서 청구취지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여러 피고들 중 일부에 대해 청구 내용을 정리하고 조정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리 회사 ‘주식회사 KK에너지’에 대한 청구 항목이 싹 빠져 있었던 것이다.


4.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혹시 착오인가, 아니면 무언의 신호인가? 하지만 몇 시간 후, 같은 날 오후에 다시 수정된 청구취지 변경신청서가 접수됐다. 이번엔 다시 우리에 대한 청구가 포함된 상태였다. 순간, 실수였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법원이 그 실수를 그냥 넘기지는 않았다.


5. 다음 기일, 재판장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원고 측이 앞서 제출한 청구취지 변경신청서에는 피고 KK에너지에 대한 청구가 빠져 있습니다. 이는 해당 피고에 대한 소취하로 간주할 수 있는데요, KK에너지 측, 이에 대해 소취하에 동의하십니까?” 기회는 순식간에 왔다. KK에너지의 소송대리인이었던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예, 동의합니다.”


6. 그날 방청석에 있던 우리 회사 실무자와 담당 변호사의 표정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그건 실수였고, 우리는 그 실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연이었지만,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끈질기게 대응해오지 않았다면, 상대방이 실수를 인정하는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7. 기일이 끝나고 나서, 원고 측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소취하 동의 취소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1심에서 그냥 끝내시죠. 항소심에 가면 또 싸워야 하잖아요.”

우리는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항소심이 필요하다면, 그건 그때 가서 하죠.”


8. 우리는 그날, 아무 말 없이 법원을 나섰다. 그건 우연히 찾아온 ‘꽁승’이었지만, 그걸 얻기까지의 시간과 피로를 생각하면 단지 공짜라고만 부를 수는 없었다.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 행운, 그것은 그 날 오후의 한 문장으로 결정되었다.


“소취하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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