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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롱이 Oct 12. 2023

가장 높은 절집 밥상엔 반찬이 없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맛

봉정암은 인제 설악산 정상 아래 위치(해발 1,244m)한 암자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산신 신앙의 대표적 기도처다. 또한 내설악 최고의 기암괴석 군인 용아장성 경관을 볼 수 있어 많은 불자와 등산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백담사부터 봉정암까지 10.6km, 도보로 통상 6시간 정도 걸린다. 땀 흘려 걸어 허기진 시간에 봉정암 본채 앞에 도착한다.


본채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방이 네개 있고 오른쪽에는 빨간 글씨로 ‘하늘내린 오대쌀’이라 쓴 쌀 상자가 쌓여 있다. 먼저 도착한 등산객과 불자분들이 방 앞 마루에 걸터앉아 하얀 그릇을 들고 식사 공양을 하고 계신다.


본채 끝 쪽으로 간다. 보온밥통에는 ‘따뜻한 밥’, 국통에는 ‘따뜻한 국’이라 쓴 검은 글자가 보인다. 반찬통에는 투박하게 썰어 양념에 무친 오이무침이 담겨 있다.


하얀 국그릇에 미역국을 담고 밥통을 연다. 하얀 수증기 사이로 구수하고 따뜻한 밥 향이 콧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향이 뇌로 가기도 전에 침이 입에 고인다.


밥통 속 쌀밥을 한 주걱 퍼 미역국에 담고 오이무침도 올린다. 숟가락과 국그릇을 들고 방 앞 마루로 향한다. 삼삼하게 간이 된 밥을 김으로 싼 식은 주먹밥도 챙긴다.


그릇의 온기가 손을 타고 뇌와 가슴으로 전해진다. 밥통과 국통에 쓰인 ‘따뜻함’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맛

마루에 앉아 하얀 국그릇을 바라본다. 밥과 국에 밑반찬은 오이무침 하나뿐인 백반이다. 투명한 국물에 하얀 쌀밥, 진녹색 미역, 빨간 양념과 노란 깨가 묻힌 푸르고 흰 오이가 제 모습을 간직하며 수채화처럼 담겨 있다.


눈은 여기까지라며 뇌는 손에 명령한다. 숟가락을 들고 국그릇을 휘젓는다. 맑은 국물이 오이무침 빨간 양념으로 번진다. 휘젓던 숟가락질을 멈추고 크게 한술 떠먹는다.


오이무침은 빨간 양념을 토해내며 본연의 색에 가까워 지지만 간은 약해지고 맛은 덜하다.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이 오이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얀 쌀밥은 한알 한알 풀어지며 은은한 단맛을 국물에 뱉어내고 흐릿한 빨간 국물 속 여린 감칠맛을 받아들인다.  촉촉해진 밥알을 씹을 때마다 구수함이 물씬하다.


진녹색 미역은 졸깃한 감칠맛으로 제 식감과 풍미를 뽐낸다. 중간중간 오이무침에서 떨어져 나간 노란 깨가 국물 사이로 씹히며 고소함을 선사한다.


식은 주먹밥도 국물에 넣어 숟가락으로 풀어 헤친다. 검은 김이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국물에 김이 풀어지며 바다의 감칠맛을 보탠다. 따뜻함과 식음은 합쳐져 미지근한 중용의 국물 온도를 만든다. 먹는 이를 편안케 한다. 후루룩 마지막 국물을 삼킨다. 흰색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단순한 식재료들이 우러나고 스며들며 만들어 낸 어우러짐에 입안은 풍성해진다. 허기라는 강력한 반찬 때문에 뇌와 내장은 포만감을 느끼며 행복을 저장한다.


2024년 7월 작고하신 음식 평론가 황광해 씨는 "백반은 반찬이 없는 밥상, 밥+국+장, 지, 초의 밥상이며 밑반찬 중 김치, 나물무침 등은 지(漬)에 속하고 초(醋)는 식초, 장(醬)은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담북장 등 모든 장류를 포함한다. 장, 지, 초는 밑반찬이지만 정식 반찬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반찬이 없는 밥상", 백반에 가장 알맞은 절밥이다. 가장 높은 절집에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두 번의 절밥을 맛본다. ‘경치’라는 눈으로 먹는 밑반찬이다.


식사 공양 후 우리나라 가장 높은 곳(해발 1,244m)에 설치된 무료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크림이 들어가지 않은 설탕 커피가 나온다.


식사 공양 때 먹은 주먹밥 김같은 검은 커피를 마신다. 커피 내려지는 소리는 귀로, 색은 눈으로, 따뜻함은 손으로, 구수함은 코로, 달고 쓴맛은 혀로 오감이 어우러진다.


평지에서 먹은 커피 맛과 다르지 않음을 뇌는 안다. 다른 시간, 공간, 분위기가 만든 맛의 맥락은 추억을 뇌가 아닌 가슴에 저장한다.


가장 높은 절집 밥상엔 반찬은 없지만 '따뜻함'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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