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그래프가 없는 까레라가 까레라인가?
1963년에 탄생한 까레라는 ‘까레라 파나메리카’(Carrera Panamericana)에서 이름을 따온 만큼 모터스포츠에 기반을 둔 크로노그래프로 탄생했고,
실제로 60~70년대 모터스포츠의 전성기를 함께하면서 모터스포츠의 이미지가 강력한 정체성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시계 자체만 보더라도 불필요한 장식과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낸 간결한 디자인으로 가장 현대적인 크로노그래프로 꼽히며, 1969년에는 세계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로 기록되어 시계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 기계식 시계를 멸종시키는 쿼츠파동이 질병처럼 번지자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호이어의 경영은 점점 어려워졌고, 살아남기 위해 아무 시계에나 이름을 붙이다 보니 무엇이 까레라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아예 까레라라는 이름조차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의 시간은 다시 돌아왔고, 1996년 Carrera Re-deition으로 클래식 까레라가 부활합니다.
그런데 이 때 오리지널 까레라를 복각한 크로노그래프와 함께 논 크로노그래프 모델(GMT, 오토매틱)이 함께 등장했습니다.
사실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크로노그래프는 일반적인 타임온리 또는 데이트에 비해 크고(두껍고), 무겁고, 비싸고, 복잡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제한되는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까레라’가 그동안 쌓아온 좋은 이미지를 좀 더 많이 팔아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오토매틱 데이트 처럼 조금 더 접근성이 좋고 대중적인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시간을 겨루는 모터스포츠에서 명성을 쌓아온 까레라가 크로노그래프를 포기했을 때, 무엇이 ‘까레라’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태그호이어는(공식적인 입장은 확인된 바 없지만), 몇 가지 클래식 까레라의 디자인 요소가 있을 때 까레라의 이름을 붙이고, 모터스포츠에 국한되었던 이미지를 다양하게 확장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먼저 다음과 같은 형태적 특징을 가진 시계를 까레라로 부르기로 재정의한 것 같습니다.
1. 각지고 길게 뻗은 직선형 러그
2. 다이얼 가장자리 눈금이 새겨진 이너베젤(Inner Bezel) 또는 탠션링(Tension ring)
3.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모양에 야광이 칠해진 핸즈
4. 앞뒤가 눌린 인덱스
5. 불필요한 장식이나 숫자가 없는 깨끗한 다이얼
1967년에 생산된 크로노그래프 모델 ref.3647S와 2021년 출시된 데이트 모델 WBN2111을 비교해보면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대부분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점은, 36mm를 39mm로 바꾸는 과정에서 러그투러그는 고정한 채 옆으로만 사이즈를 키우다보니 오리지널의 날씬하고 날카로운 비율이 많이 무뎌져 좀 평범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서 클래식이 더 돋보이기는 합니다.
두 번째로, 까레라를 전통적인 모터스포츠에만 가두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로 확장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모터스포츠의 낭만이 있던 시대에 비해 자동차는 대중화되어 감동이 줄어들었고, 다른 즐길 거리는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영웅은 진짜 전투기와 머신을 조종하는 파일럿에서 스파이 영화 속 주인공이나 연예인으로 바뀌었으니, 이미지를 판매하는 시계브랜드도 시대 변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변화에 대한 까레라의 노력은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한 영화 ‘더 그레이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양복, 추리닝, 전투복을 입고 나오면서도 손목에는 항상 까레라 데이트 실버다이얼을 차고 있습니다.
까레라 데이트는 드레스워치로 분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클래식 까레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디자인 요소들 덕분에 스포티한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까레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동차 추격전과 격식 있는 사교모임에서 함께할 수 있는 시계...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