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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레라 10

그레이맨, 우주시대의 은빛 다이얼

by Zeit Feb 08. 2025




영화 제목 때문인지, 그레이맨에서 라이언고슬링은 실버다이얼의 WBN2111만 차고 나옵니다.


마지막 전투씬에서 반짝이는 시계가 위장목적에 맞지 않아 거슬리기는 했지만, 시계는 전반적으로 슈트, 추리닝, 전투복에 모두 잘 어울렸습니다. 


아무래도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시계가 모터스포츠의 디자인에 기반을 두고 있고, 다이얼이 드레스 캐주얼의 대표적인 색깔인 실버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계수집가이자 데이터분석가인 Marcus Siems라는 사람이 쓴 ‘The Ultimate watch Guide-Dial Color’이라는 글을 보면 다이얼 색깔의 유행에는 나름의 시대적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글을 쓰기 위해 Chrono24에 등록된 5만개 시계데이터를 분석했다고 합니다.



흰색은 가독성 때문에 시계역사의 초창기부터 애용되어왔고, 


검정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밀리터리와 툴워치의 필수가 되었으며, 


금색은 전쟁 직후 평화를 만끽하기 위해 드레스워치와 함께 등장하는 등 각기 유행했던 시기에 나름의 이유가 있어보입니다. 


그런데 1960~70년대 유행한 은색의 경우에는 우주 시대(Space age) 첨단기술이 미적 기준에 영향을 끼친 결과라는 점에서 좀 특별합니다.


2차대전 말 등장한 최신 비행기들은 은빛 두랄루민의 색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은빛이 멋지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본격화 되자 사람들이 더 많은 은빛에 노출됩니다. 


1961년,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되자 미국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때 세계 최초의 우주시계 타이틀도 소련의 스투르만스키(Sturmanskie)가 가져갑니다.



미국은 즉시 유인우주선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사람을 태우는 작업을 진행했고, 1962년에 존 글랜이 두 번째 우주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이때 그의 오른팔에 채워진 시계는 호이어 스톱워치 2915A였습니다. 


태그호이어는 2012년에 존 글랜 우주비행 50주년을 맞아 스페이스엑스와 합작한 Carrera 1887 SpaceX 한정판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존 글랜은 은색 우주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수많은 우주인들이 비슷한 복장으로 언론에 등장한 뒤, 피에르 가르뎅은 1968년에 은빛 패션을 선보였습니다.



이후 미-소간 치열한 우주경쟁은 1969년 미국의 달착륙을 지나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질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중 은빛은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색이 되어 패션, 영화, 자동차 등으로 확산되어 갑니다. 



특히 자동차는 기존의 전통적인 곡선과 검은색을 버리고 직선형 Wedge 디자인과 함께 은색을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그중에서도 1981년에 제작된 Delorean은 그 시대를 가장 잘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시계 중에서는 1965년 44KS를 복각한 King Seiko와 1977년에 제작된 Tudor Oyster Prince date day가 당시의 흔적입니다. 


이들은 요즘 나오는 고운 입자의 균질한 다이얼 대신 


스틸의 결을 보여주는 것 같은 썬레이로 마감되어 각도에 따라 스텐봉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첨단기술의 무게중심이 기계에서 전자로 넘어가면서 검은색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쉬운 예로 1982년 TV드라마 Knight rider에 등장하는 KITT와 1983년에 등장한 G-shock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은색이 철지난 색이 되자 어느 순간 은판 시계는 할아버지 시계, 골동품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동묘같은데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은판을 보면 더 촌스럽고 처량해 보입니다.



애플워치 같이 검은색이 기본값인 스마트워치가 확산되고 기계식시계는 점점 쇠퇴하자 색의 대칭점에 있는 은빛 시계는 더 그런 이미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행이 다시 돌아온 것인지, 가장 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는 회사에서 은빛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스틸색의 웻지디자인 차를 선보이면서 다시 은색이 괜찮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직선으로 길게 뻗은 러그를 가진 실버다이얼의 까레라는 웻지시대의 스포츠카를 시계로 복원한 것 같습니다.


정교하게 깍고 다듬어진 쇳조각들로 구성된 이 시계는 스마트워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공간이나 대기의 상태에 따라 바뀌는 빛의 반사, 


그 빛 속에서 느껴지는 재질의 물성, 


그리고 밸런스휠과 초침이 돌아가는 물리적인 움직임, 


러그와 다이얼이 이런 모양이 되기까지의 이야기와 상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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