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M기를 자처하지 마!
가족문화에 동참하는 아빠
23.12.11
예전부터 말해왔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9시면 모두 누워 얘기를 하다가 잠들었다. 첫째 준형이가 처음 유치원에 다닐 적에는 오늘 즐거웠던 일, 속상한 일 얘기해 줘. 엄마는 가온이가 쭈쭈먹다 많이 토해서 속상했는데 즐거웠던 일은 가온이가 유모차에서 길게 자서 준형이 하원하러 가서 준형이랑 신나게 놀았던 일이야. 라고 먼저 어떻게 얘기하는지 시범을 보이면 준형이도 따라서 얘기를 곧잘 해줬다.
나는 오늘 담이랑 놀고 싶은데 자꾸만 다른 친구가 와서 말을 걸어서 잘 못 놀았어. 그게 속상했는데 나도 엄마랑 같이 놀아서 기뻤어. 또 간식이 너무 맛있었어.
이런 식이다. 더 길고 자세해서 눈물이 날 때도 있고 기쁜 일에 다시 흥분이 올라와 놀다 잘 때도 있지만 이렇게 얘기를 하다 보면 너의 하루가 어땠는지 알아채기가 참 쉬웠다. 혹시나 내가 실수한 일들을 사과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하지만 남편은 이 대화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청자일 뿐이었다. 우리가 안 껴준다 한 적도 없는데.
그게 시간이 흘러 가온이도 얘기를 잘하는 요즘은 끝말잇기를 하거나 스무고개를 하다가 잠이 드는데, 남편이 참여하는 일은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다. 언젠가는 혼자 먼저 잠들더라도 이쪽을 좀 보면서 자면 어때? 어떻게 그렇게 우리를 다 등지고 벽만 보고 잘 수가 있어?라고 말해봐도 변화는 없었다.
아빠도 같이 하자 그러면 애들은 아빠를 불렀지만 불림을 당한 아빠는 귀찮아했다.
어제는 내가 요구해서 얻어낸 육아 휴가날이었다. 사장에게 꼬리흔들기 하느라 연차를 안쓰냐고. 당신 할일 없으면 나 대신 하루를 살고 나에게 휴가 좀 주라고 쓴 연차였고 그렇게 얻어낸 내 귀한 하루였다.
카페에서 앉아 글을 써보고 못마시는 커피도 마셔보니 저녁에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설렘이나 흥분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렇게 10시 40분. 아이들은 모두 잠들고 수영에서 돌아온 남편을 맞았다. 수영 다니고 처음으로 안자고 깨어있었나보다. 자연스레 식탁에 앉아 얘기가 시작됐다.
"그간 써놨던 아이들 훈육한 얘기를 정리해서 블로그에 담는 작업을 종일 했잖아. 나는 그걸 읽는 사람들이 이 집은 아빠가 없나 생각할 정도로 당신이 부재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내 글에서 .. 요즘보다는 과거일수록 당신에 대한 원망이나 불만이 느껴지더라. 그러면서 아이들도 혹시나 느끼고 있을까 그러면 안되는데.. 어쩌나. 우리가 좀더 친해져야 하는데 어떻게 친해질지를 잘 모르겠어.
내가 보고 좋았던 드라마나 영화, 책을 추천해도 내가 강제할 때가 아니면 시간이 없다고 보지 않으니까 우리가 무슨 접점을 찾을 수 있어.
염은희 소장 말대로 그렇더라. 엄마들끼리는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맞장구를 그렇게 쳐. 맞아요 맞아. 하면서 서로 감정적인 공감을 해주잖아. 그러니 친해지는 것이고 우리는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문제만 해결하면 대화가 끝나니까 감정적으로 가까워질 일이 없어.
일기를 써보라 해도 형식적인 남기기가 자주 있고 대부분이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에 대한 고찰이야. 당신 인생은 주로 회사에 소속돼 있어. 가족이나 나는 .. 당신은 나에게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할 여유가 없어. 집에 일을 가져와서 더 할 마음은 있지만."
당신은 얘기했어. 내가 당신의 시간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그래. 무슨 오해를 하나 들어보자. 이야기를 시작도 하기전에 나는 그랬어. 그래봐야 당신은 회사원이야 8-5시가 지나면 나머지는 당신 시간인데 뭘했나. 라고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고 당신 얘기를 들어봤지.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고 퇴근해서 저녁먹고 수영가고. 사실 내가 저녁에 잠 안자고 시간을 내서 뭔가를 해도 당신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잖아.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정말 내 24시간이 그럴 시간이 없어."
"솔직히.. 변명하지마. 내가 당신에게 지정한 작품을 보고 리뷰를 쓰라고 요구했을 때 당신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걸 해냈어. 내가 그만 두라고 한것은 1시간이면 볼 수 있는 작품을 본다고 애들앞에서는 자는척을 하고 자다가 깨서는 새벽까지 자기 하고싶은 걸 하느라 피곤해 해. 앉아서 졸고있어. 주말에 쓰러져있어. 그걸 봐야해? 그래서 체력 기르라고 운동하나 하랬더 주5일 수영을 등록했어. 밤9시 것으로. 당신에게는 내가 하라는 것을 해치웠다는 의미만 있지. 내가 왜 그걸 해보라고 했는지는 없어. '이봐나 했다. 했어. 이제 그만 뭐라해라.' 이거잖아. 준형이는 있잖아. 평일에 만화볼 시간을 모아뒀다 주말에 '스물다서스물하나'를 봐. 엄마는 이미 봤다니까. 보고 거기에 나온 대사를 나에게 해. 그럼 가온이는 드라마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형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해. 우리끼리는 그 대사가 개그요소가 돼. 우리끼리는 낄낄대는데 당신은 그 내용을 몰라. 그러고선 당신은 외롭다고 나에게 하소연을 해. 당신이 기러기아빠는 아니라고 했지? 지금 당신은 자발적으로 atm기가 되고있어. 집안 누구와 진심으로 소통하고 끼리끼리만 아는 그런 대화가 있니? 그럴 시간이 정말 없을까? 의지가 없을까?
어떤 작품을 함께 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 예를 들어서 가온이가 한글을 모르니까 끝말잇기 하다가 말도 안되는 웃긴말을 했을 때 다들 웃어서 다음에 다른 상황에서 그 말을 하면 다들 웃겠지. 같은 날을 기억하면서 웃음이 날거야. 그날을 함께하지 않은 당신에게는 그 기억이 없으니 웃음이 없어.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야하는데 웃음을, 그때의 그 기류를 .. 그래, 개그를 설명하면 그게 웃겨? 당신은 그게 왜 웃겨? 라고 생각하고 기억에 크게 남지 않을거야. 우리끼리는 우리가족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어.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 참여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외롭다고 말해. 같이하자 하면 아빠는 그런거 '원래' 안한다. 그래. 원래 안하던 사람이라도 아이들이 해보자 하면 한번 해볼까? 하고 말이 바뀔수 있어.
아빠는 내 요구를 수용하는 사람이야 라는 인식을 줄수 있다는거지.
당신은 우리가 강남 스타일 틀어놓고 말춤을 출때도 식탁에 앉아 관람객이 되지 일행이 되진 않아. 복근운동 유투브를 보면서 다같이 힘들어하는 동작을 할때도 혼자 책 읽어. 단 한번도 함께 춘 적이 없어. 그런 우스꽝 스러운 춤을 추는건 당신 스타일이 아니라서?
당신은 정해진 선이 있어. 우리들을 위해서도 절대로 그것을 넘지 않아. 누구보다 자기자신이 가장 중요해."
내 독설에 남편은 쓸쓸한 응답을 한다.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어디에 소속돼 있기는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것이 아니라 주변부인것 처럼 아싸인 사람있잖아. 그게 나라서 그런 포지션이 익숙해서 가정에서도 그래왔던 것 같아."
끄덕끄덕 . 남편은 스스로 끄덕이기만을 반복한다.
"당신 말대로 함께하는게 맞겠다. 가족만의 문화를 만들고 그걸 즐기는게 필요해. 나도 앞으로는 동참해볼게."
이렇게 대답이 나온적이 별로없다. 오늘은 예전이랑 뭐가 달랐을까?
전에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다보면 꼭 버럭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를 나에게 어필하려고 했었다. 마치.자신은 밥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나는 마리앙뚜와네뜨가 돼서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세요. 춤을 어떻게 추는지가 더 중요해요 라는 말을 내뱉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가정은 가족이라는 것은 어디에 의미가 있을까. 그래, 가장의.역할을 충실히 하는 당신이 참 고마워. 하지만 그건 80년대 우리들의 아빠세대지 지금은 아니지 않나? 요즘 시대에는 아빠도 함께 놀고 친구같은 아빠가 대세지. 당신도 그러기를 원하잖아. 그러면서 행동은 보고 배운대로만 하고 있다. 달라지기 위한 각성조차 없는 것 같다. 우리라는 울타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세워져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외롭다고 느낀다면 그건 울타리가 틈튼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무도 안웃는데 우리 가족만 박장대소하며 낄낄거린다면 그건 이미 우리만의 이야기가 있는 '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 화법이 변한걸까. 받아들이는 남편이 변한걸까. 어쨌든 자각했으니 변화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