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시댁에 가는 며느리
21세기에 이런 집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주말이면 할머니댁에 갔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단 한주도 빼놓지 않고.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러니까 13년을 그러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14년?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단한주도 빼놓지 않고 시댁에 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일을 시작한 후에도 그러했다. 중학생 이후에도 2~3주에 한 번은 할머니댁에 갔다. 반대로 어머니의 친정 나에게 외할머니댁은 1년에 단 세 번 명절 당일 오후와 외할아버지제사 때 방문하는 것이 전부였다.
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하시고 어머니는 안 도와드리고 뭐 하냐는 아버지의 닦달과 넌 도움이 안 되니 가서 쉬 기나 하라는 할머니 사이에 끼어있었고, 어린 나는 상을 차리고 수저 놓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상을 옮겨주는 일(힘쓰는 남자의 일)을 하고는 당연한 듯 옆으로 누워 티브이를 보았다.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선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만 두고 일이 있다며 나가는 일이 잦았다. 본인이 돌아오는 시간의 제약도 없이 말이다. 밤이 늦어 언제 오냐는 전화를 걸면 "금방 간다. 지금 가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금방이라는 시간은 30분도 1시간도 2시간도 혹은 더 긴 시간도 될 수 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엔 그 전화조차도 할 수 없이 마냥 기다렸었다.
명절이면 우리는 명절 전날에 할머니댁에 갔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주아주 어릴 때부터 명절음식준비를 같이했다. 전도 부치고, 송편도 빚고, 만두도 빚었다. 차례상을 차리고, 차례가 끝나면 밥을 뜨고(어머니가 왼손잡이라 왼손으로 밥 뜨면 재수 없다고 항상 밥은 내가 떴다.) 밥상을 차리고 수저를 각자 가족의 위치에 맞게 놓았다. 위치에 맞게란 아랫목은 할아버지, 그 옆엔 아버지, 방안쪽 편은 삼촌,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리는 할머니, TV를 등지는 자리는 나와 어머니가 앉았다. 좁아도 재수 없으니 모서리에는 앉지 않도록 해야 했다. 차례가 끝나면 제기들을 설거지하고 물기를 닦아 정리했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는 밤 깎기와 무거운 제사상을 옮겨주는 일뿐이었다.
할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으시는 부지런한 분이셨고, 어머니는 한숨 돌리려 하면 아버지가 누운 채로 "어머니 뭐 하시잖아" 눈치 주는 통에 잠시 앉아 쉴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차례가 끝나고 식사가 끝나면 누워서 TV를 보다가 잠을 잤다. 어머니가 그만 가자고 해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할머니가 "애미도 친정에 가서 형제들도 봐야 하지 않겠니"하면 아버지는 인상을 팍 쓰고 "이따가" 하며 잠을 더 잤다. 그렇게 오후 느지막이 외할머니댁에 가면 당연히 어머니의 다른 형제들은 이미 떠난 후거나 막 떠날 때였다. 아버지는 외할머니댁에서도 누워서 어머니에게 "장모님 뭐 하시는 데 뭐 하냐"라고 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일은 전등갈기 벽에 못 박기 벽선반 설치하기 컴퓨터 고치기와 같은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들이었다. 그마저도 제때 해주지 않아 어머니가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수리기사를 부를 때가 많았다. 아버지에겐 약간의 편집증과 강박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수리기사를 부른 일로 크게 화를 냈다. '수리기사가 우리의 좋은 부품을 빼가고 중고나 나쁜 부품으로 교체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옛날 시대에 정말로 그런 사기꾼들이 있기도 했겠지만, 평소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아버지 행동들을 생각하면 아버지에겐 약간의 피해망상과 편집증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심리학과교수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본인이 진작에 수리해 줬으면 될 것을 안 해주니 부른 건데 그걸로 화를 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마저도 조립같은 일들은 그런걸 잘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내 몫이었다. 덕분에 나는 인터넷으로 뭘 시키더라도 리뷰에 남자도 혼자 조립하기 힘들었다는 물건들 조차 혼자 척척 조립해낸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옷은 아무렇게나 의자나 베란다 빨래건조대위에 얹어놓고 양말은 바닥 아무 데나 던져놨다. 밤 11시 12시에 들어와서는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 후 아이 저녁 챙기고 집안일하고 겨우 잠드려는 아내한테 "먹을 거 없냐"라고 물었다(밥 차려달라는 의미다). 다 먹은 그릇은 아무렇게나 팽개쳐두고, 거실도 없는 집에서 과자 먹으며 새벽까지 TV를 보았다. 아침엔 과자부스러기와 과자봉지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있고, 항상 늦었다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화장실엔 항상 담배냄새가 가득 배어있었고, 화장실 불은 항상 켜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가스밸브가 잠겼는지는 꼭 확인하던 분이었다.
어머니가 약속이 있어서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날 하필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게 되면, 아버지는 들어와서 어머니가 없는 것을 보고는 이미 흥분상태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게 네 엄마 어디 갔냐며 왜 여태 안 들어왔냐며 나를 추궁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미리 약속 있다고 말을 했었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몇 시쯤 들어온다 하셨다 말해도 그건 상관이 없었다. 핸드폰이 생긴 후로는 집전화로 들어오지 않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전화를 받지 않으면 마치 일부러 받지 않은 것 마냥 씩씩대며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부리나케 집으로 와야 했고 아버지는 굳굳이 본인눈으로 확인하려 차를 타고 가서 어머니를 데려왔다.
이런 모습은 나에게는 더 심했다. 나는 약속이 있으면 육하원칙에 의해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하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같이 만나는 친구의 번호, 여럿이 만날 땐 친구 세명의 번호를 알려줄 때까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친구집에서 놀고 자고 온다는 약속이 잡혔는데 나에게는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그 시간 동안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친해져 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오기로 한 시간이 9시라면 아버지는 8시부터 언제 들어오냐고 집요하게 내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걸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재중전화 15건을 볼 때의 심정을 누가 알까. 본인이 집에 없으면서 마치 집에 있는 냥 언제 들어오냐고 물을 때도 많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았다. 대학생이 된 나에게 통금 9시를 제시한 것이 아버지였다. 본인친구는 아이통금이 7시라며 마치 자신이 엄청난 아량을 베픈냥 내게 말하였다. 하지만 신입생 환영회에서 8시 반 이전에 집에 가야 한다며 나오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결국에 싸우고 싸워서 10시로 통금을 늘렸지만 역시나 술자리에서 그 시간에 집에 가는 동기 선배 후배는 없었다. 나는 다음날 항상 내가 없어진 후로 벌어진 나만 모르는 내용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대학교 OT를 꼭 가야 하는 거 아니라고 가지 말라고 했고, 성인이 된 아이가 선배동기들과 MT를 가는데 인솔자번호를 알려주고 가라 하였고, 어딜 가든 매번 친구들 3명 번호를 알려주라고 했다. 성인이 된 아이에게 그러는 부모가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친구는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 부모들이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장 웃긴 점은 정작 본인은 뭘 하는지 얘기도 안 해주고 아무 때나 집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대체 뭔 사업을 그렇게 매번 한 건지 우리 가족은 자세히 모른다. 대체 뭘 하느라 매일 밤 12시 심지어 새벽 2시 3시에 들어온 건지 모른다. 대체 뭘 한다고 일요일에도 일이 있다며 나가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사업을 대체 뭐하는지 알아야겠다고 자세히 얘기해 줘"라고 하면 "당신은 말해도 모른다"라고 했다. 어머니가 무식한 분이어서 그런 말을 했냐고 하기에 어머니는 그 시절에 서울에 있는 4년제 여자대학교를 나온 분이셨다.
이렇게나 가부장적인 건 옛날 분이고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경제권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10살 무렵부터 다시 일을 하셨고 월급이 꽤 많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집에 현금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사업에 필요하다며 어머니에게 돈을 송금할 것을 자주 요구했다. 그러니 나는 어머니가 왜 이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고, 저렇게 불합리하게 사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연민을 느끼며 자라왔다.
최근 브런치에서 박수소리님의 글을 읽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내가 친정에 갈 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아내가 약속이 있다고 하면 정말 그곳에 간 게 맞는지 전화해서 확인을 한다.
우리 집 이야기가 아닌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여성인권이 매우 낮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은 그 유명한 무슬림문화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그 정도였다는 얘기다.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경제력도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연민해야 할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아이가 다 큰 성인인 어머니가 선택한 길과 선택한 모습에 대해 연민할 이유는 없었다. 추호도 이혼할 생각은 없다는 어머니를 난 왜 연민해 왔을까. 아마도 어머니가 답답할 때면 내게 하소연을 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선택권 없이 태어난 나를 연민해야 했다는 것을 어린 나는 몰랐다. 그걸 깨닫는데 30년이 걸렸다.
연민은 그만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