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망한 빛의 소망
너한테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
존경하는 마음을 품는다는 것, 그것은 참 특별하고도 신비로운 일인 것 같아.
그 사람의 발자국을 보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으니까 말이야.
우리는 오늘 위대한 건축가이자 결핍으로 가득 찬 사람, 라즐로의 일생을 따라가 볼 거야.
오점으로 가득했던 그의 삶이 어떻게 업적을 남긴 삶으로 변화했는지, 궁금하지?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정착하게 된 주인공 '라즐로 토스'
미국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과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던 도중,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해리슨'이 그에게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브루탈리즘을 바탕으로 한 대담하고도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감시와 갈등 속에서 여러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건축물에 자기 자신을 투영하던 라즐로는 점점 건축에 집착하게 되고 피폐해져 가는데.. 역사가 남긴 트라우마 속에서도 예술은 피어난다!
라즐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 전에, 우선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 정도는 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브루탈리스트라는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를 다루고 있어. 그래서 영화의 초반부에 갈 곳 없는 유대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장면이 나오게 돼. 라즐로도 그들 중 한 명이야. 또 여러 각도로 뒤틀린 모습의 자유의 여신상이 나오는데, 이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뒤틀려있는지를 암시하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어.
라즐로는 홀로코스트에서 홀로 살아남은 유대인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미국에 있는 사촌의 집으로 떠나.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건축' 실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어. 그 재능을 알아본 사촌이 그에게 인테리어와 가구에 대한 의뢰를 맡게 한 거지. 하지만 곧 사촌에게서도 쫓겨나게 되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 극심한 허기와 추위, 정신적인 아픔으로 그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로 전락해 버려.
영화의 초반부부터 주인공이 엄청난 시련을 겪는 것 같아 보여.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었어.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고, 자신의 건축에 대해서도 무시를 당하게 되거든.
너의 인생에서도 많은 시련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남과 다르다고 차별당하고, 부족하다고 무시받고, 누군가 허락도 없이 내 인생을 조종하려 들고.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너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의 감정마저 존중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런 사람들은 본인의 인생에 화가 나기 때문에 세상에 화풀이하는 거야.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상처 주지 않아.
라즐로의 재능을 알아본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해리슨'이라는 사업가야. 그는 어머니를 위해 '밴 뷰런 인스티튜트'라는 문화기지를 짓고 싶어 해.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거액의 보수를 약속하며 밴 뷰런의 건축을 맡겨줄 것을 부탁해.
근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전에 서재의 건축과 설계를 부탁한 사람이 바로 해리슨의 아들이었다는 거야. 당시에 라즐로는 훌륭하게 서재를 짓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를 본 해리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를 매몰차게 내쫓았었지. 그래놓고선 서재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아보자, 다시 라즐로에게 부탁을 하게 된 거야.
라즐로는 해리슨에게 쫓겨난 후에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며 필라델피에서 건축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이 썩 달갑진 않았어. 하지만 아픈 아내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 없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예술가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었어. 그는 아마 밴 뷰런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꿈을 꿨을 거야. 그것이 바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인 거지.
그들은 매우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각자의 아픔을 공유하며 건축에 대해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게 돼. 하지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라즐로에게 정육면체를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정육면체를 만드는 것이었어.
해리슨은 라즐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사업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오갈 곳 없는 그의 아내 '엘리자벳'과 조카 '소피아'를 자신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줘. 라즐로와 엘리자벳이 가진 예술적 재능과 총명함에 대해서 칭찬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예술적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시기,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가 가득했어. 해리슨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야. 라즐로는 해리슨이 요청한 '밴 뷰런'만 완성된다면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사실은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집착하게 돼.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도 마찬가지야.
당장 내가 살 수 있는 것보다 현재의 내 처지보다 더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을 탐하게 되지.
하지만 물건의 소유자는 반드시 '내'가 되어야 해.
나의 수준과 형편에 맞지 않는 물건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어.
사람이든 물건이든 '집착'하게 되는 순간부터 그 대상은 내 손을 떠난 거야.
항상 내 인생의 주체는 '나'여야 한다는 거, 그것이 전제되어야 사람이던 물건이던 건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
어쨌거나 라즐로는 밴 뷰런을 짓는 데에 몰두하게 되고, 그동안 엘리자벳과 소피아는 해리슨의 가족들의 멸시 가득한 시선 속에서 생활을 이어나가. 조카 소피아는 해리슨의 아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
엘리자벳은 욕망과 차별이 난무한 그곳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라즐로의 건축에 대한 열정을 꺾지 못했어.
사실 라즐로도 건축물을 짓는 동안 온갖 차별과 무시를 당해. 그는 건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녔지만, 해리슨은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탐탁지 않아 했어. 새로 고용된 건축가는 라즐로와는 정반대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었어. 결국 그들은 현장에서 시종일관 부딪혔고, 그 과정 속에서 현장의 인부들이 죽게 되는 사고까지 발생해. 이로써 공사는 중단과 함께 무기한 연기가 되고, 자신과 아내인 엘리자벳의 건강 상태마저 점점 더 악화되는 인고의 시간들이 계속 돼.
너는 괴로움의 순간들을 어떻게 견뎌냈어?
각자가 어려운 시간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를 거야.
그렇지만, 네가 겪은 아픔마저 타인의 아픔과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행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야.
마음의 병도 각자에게 맞는 치료법이 있어.
그 치료법은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해.
아무리 의사여도 내 마음속 깊은 소리까지 들을 수 없어.
그 소리를 따라가는 일, 너만이 할 수 있어.
영화의 2부에서는 라로의 아내 '에르자벳'과 조카 '소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돼.
해리슨과 에르자벳이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 그들은 절대 섞일 수 없는 존재임이 증명되는 듯해. 해리슨은 벽화를 건축물의 일부로 보지만, 에르자벳은 벽화를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보거든. 이는 곧 미국인들과 이민자들이 동화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의 중요한 장면 중에 하나야.
같은 걸 보고 있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적, 많지?
세상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인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해.
왜냐고?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이니까.
이제 '아메리칸드림' '돈'은 라즐로에게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단 하나,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완성시키는 것이야. 그는 재단에 쓰일 가장 중요한 소재인 '대리석'을 두고 다시 한번 건축가들과 대립해. 라즐로가 원하는 것은 청록색이 감도는 대리석이었어. 우여곡절 끝에 그는 대리석을 얻는 것에 성공하지만, 그곳에서 해리슨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게 돼.
그가 순백의 대리석이 아닌 청록색의 대리석을 원했던 건, 청록빛이 그의 얼룩진 인생을 나타나기 때문 아닐까?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내 엘리자벳이 휠체어가 아닌 두 발로 서서 해리슨이 라즐로를 강간한 사실을 그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하게 돼. 해리슨이 사라졌을 때 카메라는 그를 쫓지 않고 롱테이크로 그의 아들의 동선을 따라가. 이후 손전등을 비춘 경찰들과 그를 찾는 사람들, 마지막 장면엔 영화에서 처음으로 건축물 내부인 십자가 모양의 햇빛을 비춘 재단을 카메라 워킹으로 보여줘.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완성시키고자 한 '밴 뷰런 인스티튜트'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그는 영화에서 총 세 번의 건축을 하게 돼. 첫 번째는 의자, 두 번째는 서재, 마지막엔 밴 뷰런 인스티튜트라는 문화기지. 이 세 건축물은 모두 하늘과 빛을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소재 또한 마찬가지야. 건축물에 쓰이는 소재는 크게 철근, 콘크리트, 대리석 세 가지. 철근은 곧 펜실베이니아를 의미, 콘크리트는 브루탈리즘의 주 소재, 대리석은 라로의 밴 뷰런 인스티튜트 건축에 아주 중요한 소재로 쓰여.
그는 유대인들이 하늘을 보며 삶에서 한 줄기 빛을 찾길 바랐어. 그가 밴 뷰런의 재단에 유독 집착한 이유지.
평생을 이방인 신세로서 정착할 곳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가 만들고자 했던 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지속성과 견고함을 가진, 수많은 사람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
완성된 건축물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비친 적이 없고,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재단의 한 줄기의 빛을 통해 그의 건축 철학과 모든 것이 설명돼. 라즐로의 건축물에는 비단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미국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을 거야.
에필로그의 제목 또한 '현재 속의 과거' 야. 라즐로의 브루탈리즘은 시간을 초월한 힘을 갖고 있어.
비단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소피아, 해리슨, 고든, 현장에서 일했던 모든 사람, 더 나아가 유대인들과 미국인들의 삶까지 담고 있는 밴 뷰런 인스티튜트는 그 자체로 역사이자 산증인인 거야.
영화는 인물들의 향후 행방이나 이야기의 결과를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소피아가 라즐로의 건축물에 대해 연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나게 돼.
이렇게 대단한 건축물을 짓고, 많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그의 인생이 왜 이리도 처연하게 느껴지는 걸까?
사람들은 흔히 위인들의 업적을 보고 감탄하곤 해.
하지만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그들이 남긴 업적이 아닌, 걸어온 길이야.
대단한 건축가인 라즐로의 인생에는 참 오점이 많았어.
그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에 매춘부 가게의 단골이었지.
동시에 그는 아픈 아내를 둔 미국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유대인이었어.
우리가 그의 인생을 함부로 비난하고, 평가할 수 있을까?
라즐로의 인생은 우리들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아.
세상에 결함 없는 사람 없고, 사연 없는 사람 또한 없어.
우린 그저 서로의 모자란 부분들을 감싸며 살아갈 뿐이야.
라즐로처럼 오점이 가득한 인생일지라도, 너에겐 장점 또한 존재해.
얼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대리석이 가진 시간 속의 가치야.
네가 그 시간들을 어떻게 바라보는 냐에 따라서 대리석은 역사를 가지게 될 거야.
21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이지만, 우리들의 인생은 이보다 훨씬 더 거대한 시간을 담고 있잖아.
너의 브루탈리즘은 후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남던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