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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Oct 21. 2023

엄마의 희망

 엄마는 우리 남매가 어려서부터, 결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결혼은 일찍 하는 게 좋은 거야.”

 엄마는 서른 살에 결혼했는데 당시로는 늦은 편이었다. 엄마가 늦게 결혼해보니 안 좋은 점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었다. 그 안 좋은 점이라는 것을 귀 기울여 들어보면 한 가지 결론에 수렴하였다. 늦게 출산하면 자녀 양육이 힘들다는 것. 물론 그 하나가 엄마에게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수 있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 결혼 이야기는 모터를 달았다. 틈만 나면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유행어처럼 반복했다.


 어른들은 세대가 다르므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이 새 가정 꾸리는 것까지 보아야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엄마, 제주도가 전국에서 이혼율 제일 높은 거 알죠? 둘에 하나가 이혼하는데 그래도 결혼하는 게 좋아?”

 “이혼을 안 해야지.”

 말이 안 통하는 엄마다.


 지난 4월, 동생 결혼식에 참석했다. 제주의 전통 혼례는 사흘 동안 했다는데, 저번에 친구 결혼식 때 보니 식전 피로연 하루, 본식 하루 해서 이틀을 했다. 동생도 이틀 한다고 했다.

 부모님은 피로연장 옆 호텔에서 묵었다. 새벽부터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해야 한다고 동생이 이곳에 숙소를 잡아주었다. 서울에서 온 큰이모가 엄마 옆에 하루 종일 붙어서 이것저것 많이 챙겨 주었다. 큰이모는 주름이 많이 잡힌 내 양복을 보더니 손수 다려주었다. 아침에 숙소로 갔더니 엄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긴 속눈썹과 진주 귀걸이, 단아한 머리 모양까지 이미 혼주 화장을 마친 상태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 어색했다. 화장이 조금 과하다 싶었는데 그래야 사진에 잘 나온다고 했다.

 피로연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했다. 사돈네와 서로 인사한 뒤 손님을 맞았다. 11시가 되자마자 내 친구가 부인과 아이 둘을 데리고 제일 먼저 왔다. 이후 많은 손님이 찾아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 오후가 되자 엄마는 힘이 다 빠졌다. 친척 어른들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주셨다.


 다음 날 새벽에 김밥집에 갔다. 새벽 5시에도 문을 여는 김밥집이 꽤 있었다. 몇 줄 사서 엄마 숙소에 건네고 왔다. 부스스한 엄마는 평소와 같았다. 마른 몸 위로 내복을 걸치고 있었다. 어제는 한복으로 가려 보이지 않던 얄팍한 팔다리가 드러났다. 곧 신랑 친구가 와서 메이크업 샵으로 데리고 갈 거라고 했다.

 식장은 차로 1시간 걸리는 곳에 있었다. 가는 길에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말 그대로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날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괜히 내가 설렜다. 하나뿐인 동생이 결혼한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식장은 아름다웠다. 나무와 꽃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신랑 친구가 사회를 보았고, 주례는 없었다. 엄마가 축사했다. 엄마답게 간결한 글이었다. 다 써놓고 보니 마음에 안 들었는지 큰이모에게 검수를 부탁했다. 신랑 측에서는 누나가 축사를 맡았는데 엄마의 축사보다 세 배는 길고 감동적이어서 신랑 신부가 눈물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역시 울지 않았다. 잘 살거라, 진심 한 마디 외에 무엇도 필요 없는 엄마였다.

 동생 내외는 식을 알차게 준비했다. 자랑스러웠다. 마지막에 둘이 “결혼을 선언합니다!” 외치더니 음악에 맞춰 율동을 추었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예쁜 결혼식이었다.


 이곳에 살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가 보니 제주도가 참 좋은 곳이란 걸 느낀다. 공기도 좋고 물맛도 익숙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섬이 너무 답답해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때도 있었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가까이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는 소중함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다음에 제주도 집에 갔을 때, 엄마를 위한 반찬을 했다. 두부를 으깨고 브로콜리를 데쳐서 볶았다. 떡갈비도 했다. 의사가 말하길 근육이 너무 없어서 단백질 먹고 꾸준히 운동해야 한댔는데, 고기 씹기가 힘드니까 부드러운 음식을 하고 싶었다. 마음 수양하듯 담담히 요리했다. 엄마가 맛있다고 했다.


 엄마는 팔이 아파서 팔을 가슴 높이 이상 들기 힘들었다. 팔을 주물러 달라고 했다. 근육이 없고 살가죽만 겨우 붙어있어서 어디에 툭 부딪히기라도 하면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아프기 전에, 봄이면 고사리를 따러 다녔는데 나에게 같이 가자 했었다. 한번을 안 갔는데 그것이 후회된다. 이제는 고사리 따러 갈 기력이 없다. 엄마 팔목이 고사리보다 얇아지려 한다.

 암은 희망과 절망을 굽이굽이 가져온다. 길을 돌기 전까지는 오르막일지 내리막일지 알 수 없다. 전조 증상도 없이 갑자기 쓰러졌던 그날처럼, 쓰러졌는데 지팡이 짚고 다시 일어난 것처럼, 돌 구르듯 어떻게든 애쓰는 것이 인생 같다.


 다음 달에는 나도 결혼식을 한다. 동생네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양가 부모님과 형제 내외만 모셔놓고 간단히 식사하기로 했다. 가족사진도 다시 찍기로 했다.

 엄마는 아들딸 다 훌륭하게 키워서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보냈다. 소원을 이뤘으니 참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이제 본인을 위한 인생만 남았다. 결혼 생활의 어느 때보다 더 아빠가 옆에서 잘 보필하고 있다. 엄마도 손주 보려면 음식 잘 먹고 부지런히 운동해야 한다. 엄마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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