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항상 관대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문제는 나였을까?

by 갬성장인

호운과 여름이 척척 피난대피훈련을 준비하며, 여름은 연출자였던 것처럼, 호운은 촬영감독이었던 것처럼 최초, 최고, 최선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맡고 있던 화재조사도 어느덧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나 또한 호운과 여름이 고군분투하던 최초, 최고, 최선의 피난대피훈련 준비에 조금씩 참여할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역할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숨 가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900여 명이 참여하는 피난대피훈련의 준비라, 모든 것이 항상 순조로울 수는 없었지만 그 둘은 문제를 발견함과 동시에 상의하며,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고, 나의 합류를 내심 반겨주었다.

하지만 신은 항상 관대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나에게만큼은 그러했다.

당시 두 달 정도를 화재조사로 시달리다 보니, 나는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하루에 편안히 자는 시간은 두 시간이 되지 않았고,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깼었다.

이웃이 다투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등등 그 어떤 소리에도 잠이 들면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던 내가 아니었던가

잠에 대한 걱정도 잠시, 순간순간 호흡이 멎는 듯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며, 감정이 기복이 너무나 심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번씩 롤러코스터를 탔다.

애써 감추려고 했지만 주변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다시금 걱정을 끼치는 약하디 약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 피난대피훈련까지만 마무리하자, 화재조사만 종결짓자. 이제 다 왔어 목적지가 눈앞이야 정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결정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음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 이것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과 호운이 훈련준비의 진척도를 이야기해 주며, 주요 의사결정 사항을 상의해 왔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연결되지 못했다. 아니 조금 더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의 이야기가 안 들렸다.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어 문장이 되고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어 문단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단어, 문장, 문단이 들리지도, 이어지지도 않았다.

"제가 좀 생각이 복잡해서요. 죄송하지만 두 분이 상의하시고 헌철 님께 보고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훗날 정신건강의학과란 곳을 찾아 상담과 치료를 받으며, 알게 되었지만 당시 나는 불안, 강박, 우울 등을 동반한 소진증후군 즉 번아웃 증후군을 않고 있었고 그로 인한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이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십수 년을 험하디 험한 현장을 누비며 생활해 왔고 진심은 항상 통한다라는 나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희망을 속삭이다 절망을 안겨 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신이라는 존재는

항상 관대한 존재는 아니었다. 나에게만큼은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작 문제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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