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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Pie May 21. 2024

의사보다 아는 형, 판사보다 동네 형

멘토의 자격


유난히 화창했던 지난주 목요일, 신 선생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12학년 졸업반 학생들을 위한 ”레거시 데이“를 가졌습니다. 레거시 데이는 다음 달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위해 학교와 졸업생 동문회에서 준비한 하루 일정의 컨퍼런스 행사입니다.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올 해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침 8시 30분, 캐나다 BC주 법원 판사이자 우리 학교 졸업생인 잭슨(가명) 판사의 키노트 강연과 좌담 토크쇼 형식의 인터뷰로 제법 거창하게 시작, 곧이어 카페테리아로 이동해서 동문회 선배들이 졸업반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브런치를 즐겼습니다. 브런치 후에는 30여 명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교내의 여러 장소에 마련된 네 가지 그룹세션에 참여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이런 세션들은 보통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졸업생들을 초빙해서, 대담 또는 강연 형식으로 졸업생들을 위한 진로 상담이나 인생 조언등을 듣기도 하고, 또 가톨릭 학교의 특성상 신앙과 가치관에 관한 세션도 한 꼭지 차지합니다.


레거시 데이에 강연자로 초빙을 받는 졸업생들은 그래도 나름 캐나다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의사, 법조인, 운동선수, 회계사, 그리고 최근에는 IT업계의 인사들이 주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특이하게도 바로 작년에 졸업한 졸업생들 중 12명을 초대해서, 그들의 지난 1년간의 생생한 대학 적응기를 들을 수 있는 세션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졸업반 아이들도 수십 년 전 졸업한 아버지 뻘 되는 동문의 인생 성공담을 듣는 것보다, 불과 1년 전에 졸업한 선배들의 대학 생활 이야기를 듣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더군요. 수강과목 선택에서부터, 대학에서 새 친구 사귀는 이야기, 교수님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숙사 선택 요령이나 자취할 때 고려해야 하는 점 등, 시간 관계상 미처 다 받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요즘 대학 현장에서 교수들이 Chat GPT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평가에 반영하는지 등과 같은, 현재 재학 중인 학부생들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 세션에 초대를 받은 졸업생들이 의례히 기대하듯 그렇게 대단한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물론 캐나다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명문 대학의 인기 학부에 진학한 우등생들도 있었지만, 간호사가 되기 위해 일단 2년제 전문대 간호학과에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소위 명문대는 다 떨어지고 할 수 없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캐나다 동부 토론토 근교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규모의 대학에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심지어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적응에 실패해서 그만두고 다시 학교를 옮기게 된 이야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주눅이 들어 보인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의견과 실패담을 유쾌하게 나누었고, 재학생 후배들도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더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의 아이들은 도저히 따라 하지도 못할 수재 ‘엄친아’들의 믿기 어려운 노력과 화려한 성공스토리보다, 나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동네 형들의 좌충우돌 대학 적응기에서 더 많이 배우는 듯 보였습니다.


근데 사실… 우리 어른들도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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