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젊은 날의 기억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의 수입으로 강남에서 자란 나는, 비록 늘 친구들과의 비교에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배가 고팠다거나 돈이 없어서 배움을 포기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 자라면서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남편 없이 홀로 강남에서 키우는 아이들의 기를 죽이지 않고 싶으셨던 어머니 덕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주변 친구들이 나이키를 신을 때 나도 프로스펙스 정도는 신을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집안 형편이 괜찮은 주변 친구들과 나는 별 다를 것 없다는 착각을 하며 자랐다.
나의 이런 착각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려던 1997년, 대한민국이 IMF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다 깨졌다. 나라가 부도가 나고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고 난리가 나도 친구들 중 학력과 실력이 월등했던 녀석들은 대기업에 취업도 하고, 대학원에 진학도 하고, 또 일부는 해외 유학을 떠났다. 또 집안 형편이 좋은 녀석들은 부모님의 인맥으로 취업을 해서, 친구들 모임에 반짝반짝한 회사 배지를 가슴에 달고 나타났는데, 동네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토익책이나 들여다봤던 나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998년 역삼동에 있는 한 작은 회사에, 그것도 어렵사리 취업을 했는데, 처음 석 달 동안은 수습 기간이라며 40만 원을 받았다. 하루 최소 13시간씩 일하고… 수습이 끝나면 얼마가 나오는지 옆자리 선배들에게 물어봐도 ’그냥 받아보세요‘ 라는 의미 심장한 대답만 들었다. 수습이 끝나고 처음 받은 정식 월급 명세서에는 78만 원이 찍혀있었다. 작은 벤처 회사에 다니던 친구가 자기는 회사에 간이침대까지 갖다 놓고 밤낮없이 일해도 겨우 100만 원 받는다고 푸념을 했는데, 나는 차마 80만 원도 못 받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탈출을 갈망하다가 결국 9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영혼까지 끌어모은 목숨 같은 돈을 가지고 나는 캐나다로 도망쳤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의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토론토에서, 특별한 기술도, 돈도, 직장 경력도 없던 만 스물여덟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턱도 없이 부족했던 나의 영어실력으로 공부할 수 있는 건 수학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수학과에 진학했다. 값싼 숙소를 찾다가 토론토 북부의 ‘노스욕’이라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한 한국사람이 주인인 하숙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집에 남는 방이 있어서 부업 차원에서 하는 하숙집이 아니고, 큰 집을 사서, 개조 공사를 해서 방을 무려 10개(?)나 만들어 놓고 하던 전문 하숙집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창문도 없는 지하 2층(지하 1.5층?)까지 있었는데, 큰 공간을 얇은 나무 합판으로 잘게 나눠서, 방마다 전기선과 인터넷 라인을 하나씩 넣어 놓고 하숙을 치는 집이었다. 물론 볕이 잘 드는 1-2층의 넓은 방도 있었지만 한 푼이라도 아쉬웠던 나는 값싼 지하 2층방을 쓰고 있었다.
그 하숙집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봉준호 감독의 설국 열차처럼 방가격에 따라 크고 해가 잘 들어 쾌적한 1-2 층 방에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창문도 없고 얇은 합판으로 나뉘어 방귀만 뀌어도 옆방에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지하방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한국에서 유능한 IT인력으로 캐나다에 취업을 해서 온 형님은 햇볕 잘 드는 1층방에 살고 있었고, 또 한 누님은 토론토 대학에 연구원으로 취업이 되어 이민을 온 케이스. 역시 창문 있는 방에 살고 있었다. 또 나랑 거의 동년배였던, 역시 한국에서 좋은 회사에 다니다가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로 갓 이민을 온 두 형님들은 매일 나가서 바쁘게 살 집도 알아보고 차도 알아보고, 앞으로 할 사업도 알아보고 있었다.
나와 같이 지하에 살던 친구들은 보통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왔거나 아니면 조기 유학생들이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집안 형편이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하긴 IMF를 막 벗어난 2000년에 한국에서 캐나다로 유학을 보낼 정도면 형편이 나쁠 수는 없었겠지. 그런 그들이 굳이 지하방을 선택한 이유는 고정비용을 아껴서 스키를 바꾼다거나, 쇼핑이나 유흥비용으로 쓰거나 여행을 더 자주 가지 위해서였지, 나처럼 진짜 없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한인 교회에 다니던 주인아주머니가 뒷마당에서 바베큐 파티를 열고 교회의 청년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하숙생들에게 그날은 따로 밥을 차려줄 수가 없으니 바베큐가 시작되면 뒷마당으로 와서 각자 먹을 만큼 배식을 받아가라고 했다. 간만에 갈비 좀 뜯을 생각에 하숙생들은 신이 났었다. 드디어 바베큐가 시작되고 LA 갈비 익어가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했다. 교회 청년들 파티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일찍 배식을 받은 하숙생들은 조용히 지하 2층의 한 방으로 모여서 맥주도 한잔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20대 여성으로 짐작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 화장실을 찾으러 집에 들어왔다가 길을 잘못 들어 내려오는 것 같았다.
“야, 여기 왜 이렇게 어두워? 불 좀 켜봐.”
“몰라, 스위치가 어딨지?”
그렇게 더듬거리며 내려오는가 싶었는데 잠시 후 들리는 목소리,
“헉, 이게 다 방이야? 어우 좀 무섭다. 그냥 나가자!”
그리고 그들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방에서 신나게 갈비를 먹던 하숙생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킥킥, 여기 사람 사는데… 많이 사는데…“
”아씨 쪽팔려, 아빠한테 돈 좀 더 보내달라고 해야겠네.“
다들 살짝 흥분해서 한 마디씩 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보탤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그 지하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였으니까.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천당 아래 999당이라는 캐나다로 이민 간다고 부러워하던 친구들도 많았는데. 서른여섯에 혼자되신 엄마가 빚까지 져가며 캐나다를 보내줬는데.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온 지 6개월 만에 그 돈 다 날리고, 난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조금 울기도 했고.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서 자정이 지난 지 한참이었지만 바로 뛰쳐나갔다. 새벽이 다 되도록 지쳐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리다 왔는데, 아마 그날이 내가 처음으로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날인 것 같다.
이제 나이 오십 넘고 돌아보니, 이 또한 아름다웠네. 나도 참 젊었었구나… 하하.
그때 그 하숙집 사람들은 지금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