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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ying Pie Mar 19. 2023

그때 엄마의 강남행은 좋은 선택이었을까?

그동안 브런치에서 몇 번 언급했듯이, 1978년 성동구 금호동에 살던 초등 1학년이었던 나는 갑자기 아버지를 여의고 그 이듬해 강남으로 이사를 감행하신 어머니 덕에(탓에?) 강남에서 자라게 되었다.


나는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던 구정 국민학교(현 압구정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 학교는 1977년에 세워진 학교였음에도 놀랍게도 겨울에 조개탄 난로 대신 라디에이터가 교실마다 설치되어 있었고, 실내화도 필요 없이 그냥 자기 신을 신고 생활하던 학교였다. 8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 쏟아져 들어온 외국 브랜드의 옷과 신발들은 가장 먼저 압구정동 아이들이 입고 다니는 듯 보였다. 한번은 남한산성으로 소풍을 갔는데, 다른 지역에서 소풍을 온 학생들이, 줄 서서 지나가고 있는 60여 명의 우리 반 아이들이 하나같이 나이키나 아식스를 신고, 뒷주머니에는 갈기를 휘날리는 말 대가리 하나씩 박혀있는 죠다쉬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놀라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껏 우월감을 느끼며 그 시선들을 즐기기까지 하던 반 친구들이 생각난다.


구정 국민학교의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압구정 현대아파트나 옆동네 한양 아파트에서 오는 아이들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인근 신사동에 사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지만 1981년에 신사동에 신구 국민학교가 새로 생기면서 신구 학교 학군의 아이들은 강제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신사동에서도 거의 논현동에 가까운 지역의 낡고 작은 아파트에 살던 나는 신구 학교 학군에 포함되지 않아 강제 전학을 피하고 계속해서 구정 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당시 압구정동은 현대아파트 단지가 거의 다 차지하고 있어서 대체적으로 아파트 평수에 따른 생활 수준의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체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사동은 대부분 양옥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주택에 사는 주인집 아이들과 그 집 지하에 세 들어 사는 집 아이들은 겉모습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났었다. 그리고 아직 곳곳에 논(?)과 밭이 남아 있는 지역도 있었는데 그곳 비닐하우스나 판잣집에 사는 아이들도 제법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신구 학교가 생기면서 그 아이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자 현대 아파트에 사는 엄마들이 구정 학교가 비로소 ‘정화’가 됐다며 좋아들 했다는 이야기를 친구를 통해서 들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만약 그때 내가 신구 국민학교로 옮겼더라면 오히려 더 마음 편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공부도 제법 잘했고, 친구들 앞에서 까불고 웃기는 것도 잘했어서 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어쩌다 어디 사느냐는 질문이라도 받으면, 그냥 신사동이라 하면 될 것을, 상대는 묻지도 않았는데 아주 장황하게, 그 비닐하우스들 많은 쪽은 아니고 그렇다고 단독 주택가도 아닌데 하다가 결국 “너넨 잘 모르는 데야” 하면서 횡설수설하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3년의 어느 날, 친하게 지냈던 반 친구 OO이가 와서 하는 말이,

“XX야,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가서 놀자. 엄마가 너는 우리 집에 와서 놀아도 된대. 울 엄마가 너는 좋아해. 너는 반장이고 공부도 잘해서 신사동 사는 애 같지가 않대.“


친구 엄마에게 듣기엔 너무나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분노하기보다 ‘신사동 사는 애’ 같지가 않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했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속하고 싶어 하는 그들이 나를 받아준다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몇 년 후, 머리가 굵어져서 그때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바보같이 화도 못 내고 좋아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를 감추는데 익숙해진 나는 그 이후로도 학창 시절 내내, 그리고 성인이 다 되도록 친한 친구들에게 조차 나의 진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가면을 쓰고 살았는데, 이로 인해 고등학교 때는 친했던 친구 하나를 잃기도 했다. 그때 많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열지 못하고 더 움츠려 들었다. 그래도 겉으론 누구보다 밝고 명랑했으니 가족들도 나의 이런 이중성을 학창 시절 내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캐나다가 좋았다. 여기선 아무도 나를 몰랐고 나의 백그라운드를 몰랐으니, 굳이 나를 포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꼈던 것 같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스스로 감추고 사는 것에 지쳐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내 생긴 모양 그대로 열어놓고 사니 이렇게 편하고 좋은 것을…


나는 이제 창피할 수도 있는 나의 못난 점들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어쩌면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직장에서조차, 핵심 업무에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내 약점을 드러내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사는 게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저 감사하다. 이제 나이 먹고 철이 좀 들어서일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남 상관 안 하는 이 나라의 분위기 탓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나의 가정이 든든해서일까? 아마 모두 다이겠지. 물론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을 통해서 받는 힘과 위로가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믿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엔딩씬에서 멀리서 지안을 본 동훈의 혼잣말처럼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XX, 편안함에 이르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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