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fails us sometimes, but no matter.
둘째의 첫 영성체를 앞두고 3년 전 첫째 때의 일기를 공유합니다.
유난히 무더웠던 1978년 7월의 어느 날. 늘 그랬듯이 동네 시끄럽게 큰소리로 아이들과 인사하며 유쾌하게 출근하셨던 아버지는 그 길로 영영 집에 돌아오시지 못했다. 멀쩡히 출근했던 남편이 몇 시간 후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비보에 정신없이 달려갔던 어머니,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것을 매우 가슴 아파하셨다. 고기 잡는 뱃놈은 죽어도 되기 싫다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서 서울까지 도망치고, 혼자 힘으로 야간대학까지 마쳤던 그 강인했던 남편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 아버지는 뜬금없이 성당에 나가보고 싶으시다며 어머니 손을 잡고 동네 성당에 구경(?)을 가셨고, 어머니에게 묵주와 미사보도 사주셨다고 한다. (단지 예쁘다고)
늘 바쁘고 지친 워킹맘이었던 어머니는 일요일만이라도 좀 쉬고 싶다며 시큰둥해하셨고,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성당 나가는 일은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에, 어머니는 혹시 당신이 성당에 안 나가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는 죄스러운(?) 마음과, 앞으로 당신 자식들에게만큼은 아무 일도 안 생겼으면 하는 다분히 무속신앙스러운 마음으로 누나와 나를 성당에 보내셨다. 나는 그때 국민학교 1학년이라 아직 나이가 모자랐지만 우리 사정을 들은 본당 수녀님이 봐주셔서 교리반에 등록할 수 있었고, 기도문도 많이 못 외웠지만 찰고(교리문답 구두시험)도 수녀님 파워로 무사 통과시켜 주셔서, 그 해 가을 나는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첫 영성체도 하게 되었다. 원래는 더 멋스럽고(?) 많이 외쿡스러운 세례명을 받은 것 같은데, 어린 내가 하도 발음도 잘 못하고 세례명도 자꾸 까먹으니까, 보다 못한 수녀님이 세례식 직전에 급하게 쉽고 익숙한 베드로, 바오로, 요한, 요셉 중에서 고르라고 하셨는데, 나는 바오로를 선택한 것 같다.
40여 년이 지나, 오늘 그 꼬마의 아들이 첫 영성체를 했다. 주모경만 겨우 외워서 후루꾸(?)로 세례 받았던 애비와는 달리, 지난 1년간 매주 교리수업도 한 번도 안 빠지고 지금 이렇게 의젓한 모습으로 양가 어른들의 넘치는 축복을 받으며 첫 영성체를 하는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 많은 생각들이 들어서 미사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최근 읽었던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처럼 ‘Life fails us sometimes, but no matter.’
아부지, 보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