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박사 안 키워요. 학사만 세 개!
저는 가방끈이 길지 않고 옆으로 넓습니다. 학사학위만 세 개나 모았으니 말입니다. Y2K로 세상이 망할 거라던 지난 2000년, 만 나이 스물여덟의 신 선생은 캐나다에서 다시 대학생이 됩니다. 흡사 선동열 방어율 같았던 한국 대학 시절의 어이없는 성적 덕분에 대학원 진학은 포기하고, 다시 학부로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러 가지로 절박했던 사정이 있기도 했고, 그제야 비로소 철이 좀 들기도 했는지, 맨날 성당 주일학교에서 기타나 치고 놀았던 한국에서의 대학시절과는 달리 공부를 꽤나 열심히 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영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다 저의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해서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물론 그건 아니었고, 단지 제가 대학 졸업장이 있는 편입생이라서, 대학 수준의 영어실력이 필요한 교양 선택 과목들은 다 면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공인 수학 과목들이야 예전에 입시 공부하듯 그저 열심히 문제만 풀면 되었죠. 물론 약간의 컴퓨터와 자연과학 과목들을 이수했어야 했지만, 기껏해야 실험 리포트만 써서 낼 줄만 알면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대학을 3년이나 다니면서도 제대로 된 에세이 한번 써보지 않고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되겠다고 사범대에 응시를 하려다 보니 부족한 영어실력이 발목을 잡더군요. 일단 응시 서류 자체가 다 에세이 형식이었는데, 신 선생의 영작 실력은 수학과에 편입할 당시 토플(TOEFL) 시험 보면서 라이팅 연습하던 바로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니까요. 응시 첫해에는 토론토에 있는 토론토 대학(University of Toronto)과 요크 대학 (York University) 단 두 군데의 사범대에만 지원했다가, 캐나다 교육에 대한 무지와 형편없는 영어 실력 때문에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요크대 면접관은 헛소리만 해대는 신 선생 보기가 많이 답답했던지 아예 대놓고 핀잔을 주더군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불합격시키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창피를 주는지… 이후 한동안 면접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물론 더 많은 사범대에 응시를 했어야 했지만 그 당시 교민 자녀들이나 유학생 대상으로 하는 과외 수입으로 살고 있었기에 한인들이 많이 사는 토론토 지역을 벗어나면 먹고사는 일이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절박한 마음에 온타리오주 전역의 여러 학교에 지원을 했습니다. 다행히 몇 군데 사범대에서 합격 통지를 받게 되어, 고민 끝에 온타리오 주 런던에 있는 웨스턴 대학(Western University)을 선택해서, 그동안 정들었던 토론토를 떠나 런던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런던행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일단 경제적으로 런던에서 1년을 버틸 수 있을지 불확실했습니다. 대학 학비야 뭐 Student Loan을 받아서 충당한다 해도, 과외 일자리가 잡히지 않으면 생활비는 몇 달 못 가서 동이 날 형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서부터 글자보다 숫자를 좋아하는 이과생 출신이 사범대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 지도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재수까지 해가며 준비한 게 아깝기도 했고, ‘뭐 하다가 안되면 다 접고 다시 토론토로 돌아와도 과외선생은 하면서 살 수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저 수학문제만 잘 풀면 되었던 학부시절과는 달리, 수준급의 말하기 능력과 읽고 쓰기 능력이 요구되는 사범대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초, 중, 고등학교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사범대에 다니려니 아는 게 없어도 정말 너무 없어서 매일매일이 지독한 쪽팔림의 연속이었습니다. 명색이 학교 선생이 되겠다는 사람이 영어도 잘 못해,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도 안 되는 캐나다 정치, 사회, 역사 지식에, 캐나다 학교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전혀 모르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하는 놀이도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아는 동요도 ABC송 밖에 없었으니… 가진 밑천 다 드러내고 모지리 천치가 되어, 매일매일 광장 한가운데에서 발가벗겨져 전시되는 듯한 극강의 창피함과 민망함에 고개를 들고 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입에서 ’아이고, 하느님!‘ 소리가 떠난 적이 없었지 싶습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부끄러움에 온몸이 오그라듭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아요. 하하!
설상가상 은행 잔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내니 돈을 벌어야겠는데, 교생 실습 준비하고 학교 공부 따라가기도 벅차서 도저히 따로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중,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교에 구구절절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써가며 장학금 신청을 했는데…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아 글쎄, 당시 런던 자취방 물가 기준으로 무려 16개월치 월세에 해당하는 거금을 받게 되었지 뭡니까! 알렐루야!! 학교에서 성금을 제공한 그 이름 모를 기부천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기를 권하길래 얼마나 정성을 들여 감사의 편지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날 밤, 자축하느라 방에서 혼자 맥주 한잔 하면서 두 가지를 다짐했습니다. 하나는 ‘나중에 꼭 괜찮은 선생님이 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을 도와줄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당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생각이 납니다.
이후로도 공부는 여전히 어렵고 교생 실습도 벅차기만 했지만, 좋은 동료들과 친절한 교수님들 도움 덕분에 무사히 사범대를 마치고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받은 게 많으니 반드시 갚아야겠지요? 부디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 했던 두 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