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현남이 동은에게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동은이 웃을 때 함께 피식 웃었던 생각이 납니다. 신 선생이 비록 오래전에 캐나다로 이민 와서, 남의 나라 말 하면서 이리저리 치이며 사느라 현재의 모습은 매우 조용하고 소심하고, 친구도 없이 혼자서 달리기 하고 사진이나 찍으면서 노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사실 저 되게 명랑한 사람입니다. 하하.
학창 시절 학급 오락부장이나 응원 단장은 늘 제 몫이었습니다. 1990년 고려대 입학 당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해서 이과대 전체 ‘남우 주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 내내 과 대항 게임마다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었고, 고등학교 시절 성당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도깨비 빤스’를 화려한 율동과 함께 열창하며 2박 3일간 (3박 4일?) 신나게 찧고 까불었더니 집행부 만장일치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과대 학생회장님이 직접 시상하셨죠. 하지만 그 이후 성당 주일학교 교사단의 늪(?)에 빠져서 3학기 연속 학사경고를 먹으면서도 학교에는 나타나지도 않아서 서서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2학년 때 성당 주일학교에서 교감으로 선출되고 나서는 아예 학교를 휴학까지 했어요. (으하하! 미쳤나 봐!)
그렇게 한없이 가볍고 명랑하던 신 선생은, IMF 시절 취업도 못하고 헤매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도망친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시 다니며 서서히 조용해집니다. 그러다 캐나다 온 지 7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사범대에서는 급기야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좀체 입을 열지 않는 ‘말없이 조용한 동양 청년’의 이미지를 구축하기에 이릅니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어서 특별히 소수민족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던 대도시 토론토와는 달리, 런던에 있던 그 당시의 웨스턴 대학의 사범대는 입학생의 거의 대부분 백인들이 많았고, 소수민족 출신이라 해도 2-3세들이었지 신 선생처럼 악센트 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입학 첫날, ‘으악, 잘못 들어왔다! 다른 데 갈걸…’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죠. 900여 명의 사범대 학생들 중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자,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지면서 말 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효도르는 60억 분의 1! 신 선생은 900분의 1!이라고 자조하며 웃기도 했었지요. 하하. 같은 반 동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는데, 저는 학교의 ’전산 실수‘로 들어왔다고 농담을 해서 그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만, 사실 저의 진심이 포함된 농담이었던 것 같습니다.
명색이 교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학교에서 누가 말이라도 시킬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피해 다니는 한심한 날들이 이어지던 10월의 어느 날,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체육과 교수님은 한국에서 어린 시절 했던 ‘치기 장난’이나 ‘다방구’와 비슷한 ‘Tag’라는 게임을 하면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더 어렵습니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게임이라서 굳이 따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으니 바로 진행을 하는데, 혼자만 이 게임이 뭔지 모르는 상황... 다행히 게임 자체가 단순해서 10여분이 지나고 나니 대충 알겠더군요. 하지만 절대 나서지 않고 군중들을 따라다니며 시간만 때우려 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술래가 된 우리 반 여학생 클로이가 갑자기 신 선생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며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 당시 저의 행동 컨셉에 따르면 전혀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좀 도망쳐 주는 척하다가 잡혀주고 술래가 되어 게임을 이어가면 되는 거죠. 그리고 이 수업의 핵심은 ’이런 놀이를 어떻게 체육 수업에 활용하는가‘였지, 게임 자체의 승패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다들 그냥 설렁설렁 게임하는 시늉만 내면서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런. 데. 말. 입. 니. 다!!
잡히기 싫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한평생 게임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했던 ’게임부심‘이 갑자기 작동했는지, 아니면 사범대 입학 후 점점 추락해 바닥을 치고 있던 자존감이 이제 더 이상은 물러서기 싫다고 반항을 한 것인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승부욕의 불길이 치솟아 저의 온몸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사자나 치타에 쫓기는 사바나의 톰슨가젤로 빙의한 듯 말이죠.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느낌이었었습니다. 순간이었지만 저는 더 이상 조용하고 소심한 ’사범대 꼴찌‘가 아니었습니다. 으하하하! 그러나 학부시절 배구선수로 활약했다는 창창한 24살의 클로이는 결코 만만한 맹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살고 싶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혹시 그 소리 아십니까?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점점 흥분이 고조되면서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기 전, 또는 ”아하하하!‘ 하고 웃음이 빵 터지기 바로 직전에 드릉드릉 시동 걸릴 때 내는 그 소리 말입니다. 또는 다방구나 치기 장난을 할 때 쫓기던 아이가 술래에게 거의 잡힐 뻔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술래의 손끝에서 겨우 벗어나는 순간에 엔돌핀 터져 나오는 그 소리, 온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나오는, 웃음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그 소리 말입니다. 아이고, 제 표현력이 모라자서 제대로 묘사하기가 참 어렵네요.
아무튼, 다섯 살 아이들에게서나 나올법한 그런 괴이한 소리가 쫓기던 신 선생의 입에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 말 한마디 안 하고 존재감 없이 소심한 미소만 짓던 35살 먹은 아저씨가, 체육 수업시간에 지 혼자 안 잡히겠다고 온 체육관이 울리도록 괴성을 지르며 혼자 흥분해서 미친 사슴처럼 도망을 가니 클로이가 살짝 당황하는 듯했습니다. 그 정도에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급기야 신 선생은 마치 톰슨가젤이 뛰던 방향을 바꿔 사자를 따돌리듯, 갑자기 무릎을 굽히려다 넘어졌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바닥에서 세 바퀴를 구르다가 반대 방향으로 꺄르르르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니, 쫓아오던 클로이가 어이가 없었는지 멈추더군요. 그리고 그곳에 있던 반 전체가 잠시 얼음이 되어 저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현타가 오면서 창피해졌습니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날 이후 저는 원래의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정신적 대미지가 한 2주는 가더군요. 하지만 전화위복이라 했던가요. 그날 이후 조용한 저에게 먼저 인사하고 다가오는 반 동료들이 생겨나서 더 이상 혼자 다니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뭐 이 정도 보상이면 한번 창피할 만하지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