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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Feb 23. 2023

심야 영화를 보고도 지하철을 탈 수 있는 도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헤어질 결심'


1.


“믿는다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 유행하는 성격 유형 테스트를 믿는 편인가 묻자마자 P가 말했다. 쉴 틈 없이 그다음 말이 이어진다.


“나는, 아까 영화에서도 그래요. 믿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이야기. 믿는다는 거. 그게 무슨 의미일까.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심야영화가 끝나고, 영화관 건물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빌딩 출입문은 모두 잠겨있었다. J와 P는 한 손에는 영화 포스터를 들고 있다. J는 다른 출입구를 안다며 앞장서서 걸었다. P는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쪽으로 가면 작은 출입구가 있어요.”


약국과 핸드폰 매장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 또한 두터운 자전거 자물쇠로 막혀있었다.


“어떡하죠?”

“어, 그러면 지하 주차장으로 가야겠다. 이쪽이에요.”




계단을 내려가고 주차장 문을 열고 차량 차단기 사이를 걸어 나오자 빌딩 뒤편 골목이었다.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었는지 P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까 했던 MBTI 테스트도 그래요. 어쩜 다들 결과가 나오면 ‘나는 정말 저래’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믿는다'고도 표현하더라고요.”

"..."

“그런데 사람은 계속 변하잖아요. 흐르는데, 그 유형에만 고정되어 있을 수 있나요?”

“4호선 타죠?”

“네, 근데...”

“...”

“좀 더 걷고 싶어요.”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 생각보다 말이 적은 사람. 두 사람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오래 곱씹어보며 오래 걷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화관에서 나오는 길을 헤매고, 대화를 멈추기 아쉬워 괜히 제자리를 돌아도, 그래도 막차 하나쯤은 있을 테니. 도시의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과정에는 심야의 도시 철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2.


퇴근을 하자마자 2호선을 타고 강북으로 올라갔다. 사무실에서 재빠르게 빠져나와 출발했는데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밥을 먹으려면 심야 영화를 봐야 했는데, 영화가 끝나는 시간을 보니 겨우 막차를 타서 귀가할 수 있겠다 싶었다.


<헤어질 결심> 상영이 끝나고 왕십리역 수인분당선 승강장에서 막차를 기다린다. 뻥 뚫린 승강장에 홀로 앉아 주위의 여백을 영화의 여운으로 가득 채우고 생각에 잠긴다. 어색하고 불편했던 오늘 우리의 팔짱은 무얼 의미할까. 영화를 보면서 울던 나, 그렇지 않던 당신. 우리는 무얼 의미하는가. 딱딱한 나무 벤치에 앉아 축축한 밤공기를 그대로 물처럼 들이마셨다.


열차가 왔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이얀 빛, 그 아래에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 정훈희의 안개를 듣는다. 뿌연 안개가 차오르고 열차를 가득 울리는 투둥- 투둥-하는 소리, 상냥하고 건조한 안내음이 더해진다. 내릴 역에 도착한 걸 확인하고 안개 속에서 일어나 현실을 딛는다.


아무도 없는 곳,

...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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