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젖은 심장
지금은 그런 꿈을 잘 꾸지 않지만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꾸었다. 남편이 칼에 맞아 죽거나, 아이들이 사라지는 꿈같은 것들이다.
꿈을 꾸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너무 아파 엉엉 울다가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 감각과 느낌이 정말 현실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아침에 얼핏 선잠이 들었다. 또 꿈을 꾸었다. 문득 스미는 스산한 겨울바람처럼 불어와 잠이 깨고 나서 한참 뒤에 심장을 질펀히 젖게 하는 그런 꿈도 있다.
오늘 꿈은 그랬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생모님이 서른 두 살 꽃다운 나이에 자궁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를 할머니 손에 맡겨두고 새어머니와 가정을 꾸렸다. 나는 생모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련다.
내가 자란 곳은 완전 깡촌 시골이라 버스도 택시도 없었다. 그런데 두어 번 대구 고모네, 광주 작은아버지네로 여행(?) 비슷한 걸 갔던 기억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그날을 경험하고 있었다.
대구 고모네로 간 날은 너무나 더웠다. 얼마나 더운지 메미들이 땅바닥에 우두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쩌다 메미를 한 마리 잡으면 무서운 줄 모르고 잘 가지고 놀았는데도 그렇게 무더기로 죽어 있는 걸 보니 적잖은 충격이었고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자식을 낳지 못하던 고모와 고모부는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고모부는 머리를 길러서 파마를 했고 참으로 멋쟁이셨다. 그러나 어린 내가 보기에도 두 분의 가정은 위태로워 보였고, 결국 두 분은 이혼을 했다. 나는 다시 할머니네로 보내졌다.
다 커서 이 꿈을 꾸고 난 뒤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대구로 왜 갔지? 이게 뭐지? 여행은 맞나?
한 번은 광주 작은 아빠네로 갔다. 방 한 칸에 다락이 있었는데, 그 작은 곳에서 작은어머니와 살림을 차리셨다. 내 기억에 작은어머니는 지능이 조금 떨어지셨던 것 같고 말도 조금 어눌하게 하셨다. 착하시긴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작은아버지를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아버지는 3년이 못되어 그 분과 정리하시고 나를 데리고 할머니네로 다시 돌아오셨다.
여행이 맞나?
그 뒤에 나는 줄곧 할머니와 작은아버지와 살았다.
나는 이 두 번의 기억을 여행으로 포장해서 저장한 후 두고두고 추억했던 것이다. 평소에 새어머니께서 종종 “내가 고모한테도 자식이 없으니 너를 키우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 지 잘 몰랐다. 이후 새어머니는 아들 하나 낳고 딸이 없는 큰고모에게도 어린 나를 데려다 딸로 키우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내가 듣는 앞에서도.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아프기에 왜곡시켜 저장한 기억은 언젠가 그 참혹한 진실이 드러난다. 어렸기 때문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방어기제는 그저 왜곡밖에 없었을 지라도 진실을 외면한 댓가는 언제가 꼭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꿈을 꾸면서 잠결에 깨달아졌다.
‘아.. 그러니까 새어머니는 나를 두 번이나 버린 것이구나.‘ 본인이 나를 다시 시골로 보낸 것까지 합치면 적어도 대여섯 번, 나를 키우지 않으려고 부단히 시도를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 중에 누군가가 나를 받아줬다면 결국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런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도 마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긴 것일까? 어린 나이에 살아남으려고 처절하게 왜곡시켜 잠가둔, 내 어린 시절 판도라의 상자가 무방비로 열리고 있다.
내가 평생 젖은 심장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유기불안..버려질까봐 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엄마 없는 하늘 아래 생존해야 했던 나는 이렇게 수시로 축축해지는 젖은 심장을 갖게 되었다. 툭하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바람이 솔솔 불고 해가 좋은 날 잘 펼쳐서 말리지 않으면 나의 젖은 심장은 나를 하염없이 깊은 바다로 끌고 내려가곤 했다. 이 기분은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고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