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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Mar 03. 2023

[40] ‘배트맨’ 김상진, 8완봉 전설과 LG 이상훈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OB 꼴찌~! OB 꼴찌~!”


“LG 바보~! LG 바보~!”


OB 베어스와 LG 트윈스가 잠실구장에서 맞붙을 때면 양 팀 팬들은 1루와 3루 관중석에 나눠 앉아 기싸움을 하듯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LG 팬들이 콧노래처럼 “OB 꼴찌”를 외치면, OB 팬들은 악다구니를 쓰면서 “LG 바보”로 되받아쳤다. 다소 유치하지만, 1990년대 초반 그 시절엔 이 같은 육성 응원전이 야구장의 열기를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상처를 받는 쪽은 주로 OB 팬들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도, OB가 꼴찌인 건 부인할 수 없는 팩트였으니 말이다.


LG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하자마자 단숨에 우승을 했고, OB 베어스는 원년 우승팀이라는 타이틀이 퇴색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암흑기가 생각보다 오래갔다. LG가 우승하던 1990년에 구단 역사상 처음 최하위로 주저앉았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신생팀으로 1군 리그에 처음 참가한 쌍방울 레이더스에도 밀려 2년 연속 꼴찌를 하고 말았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배트맨’ 김상진이다. 박철순 이후 실로 오랜만에 구위로 상대를 압도하는 에이스. 움츠러들었던 OB 팬들은 다시 기를 폈다. 김상진이 등판하는 날이면 입장권을 구하려고 잠실야구장 앞에 장사진을 이뤘고,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OB 팬들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오늘 선발이 김상진이야. 그래, 한번 해보자”며 주먹을 불끈 쥐기 시작했다.


[베팬알백] 40번째 주제는 <39편>에 이어 OB 베어스의 암흑기에 만화 주인공처럼 우리 곁에 나타난 ‘배트맨’ 김상진 스토리다. 1989년 배팅볼 투수로 입단한 무명의 투수는 절망감에 빠져 있던 OB 팬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자 자존심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경기 후 당시 포수였던 김태형과 악수를 나누는 김상진 ⓒ두산베어스


직구 좋은데  자꾸 너클볼을 던져?


1990년 스프링캠프가 열렸다. 창원에서 1군과 2군이 모두 소집돼 청백전을 치렀다. 배팅볼 투수에서 정식 선수로 신분이 바뀐 김상진도 호출됐다.


김상진으로선 첫 연습경기. 뭐든지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주고 싶었던 그 시절, 스스로 익힌 너클볼까지 던졌다. 1이닝 동안 삼진 2개를 잡으며 무실점으로 역투했다.


나름대로 눈도장은 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경기에서 공을 받아줬던 신인 포수가 따로 찾아와 김상진에게 한마디를 했다.


“넌 직구 좋은데 왜 자꾸 너클볼을 던지냐?”


이 포수는 훗날 두산 베어스 감독이 되는 인물, 바로 김태형이었다.


“어린 선수가 벌써부터 너클볼 던지면 직구가 죽어. 지금 직구에 힘이 있고 회전도 좋으니까 그냥 자신 있게 던져. 너클볼은 나중에 나이 들고 던져도 돼.”


김태형 역시 1990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신인. 그러나 그해 지명을 받은 건 아니었다. OB가 이미 1988년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4라운드에서 지명했다.


사연이 있다. 김태형은 신일고 졸업반 때 경희대로 진학하기로 돼 있었으나 대한야구협회의 행정 착오로 입학이 불허되는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 2년제 인천전문대로 진학했다. 인천전문대 졸업반 때 OB가 지명했지만 김태형은 단국대에 편입해 88서울올림픽 국가대표 포수로 활약한 뒤 1990년에 OB 유니폼을 입게 됐다.


김상진은 당시 김태형의 한마디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첫 등판에 정신이 없었어요. 너클볼도 보여줘서 코칭스태프 눈에 들고 싶었죠. 경기 후 저한테 그날 투구에 대해 누구도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저를 따로 불러서 직구가 좋다고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저야 배팅볼 투수에서 갓 정식선수가 된 햇병아리였잖습니까. 국가대표 출신으로 아마추어 시절부터 명성이 대단했던 선배 포수의 한마디에 엄청난 자신감이 생겼어요. 제 직구를 믿게 됐죠.”


김상진은 1990년 2군에서 본격적인 담금질에 들어갔다. 중학교 2학년 말에 야구선수가 됐고, 투수는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시작했다. 뒤늦게 투수가 된 만큼 기본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정말 어렵게 정식 선수가 됐잖습니까. 이천 OB 맥주공장 옆에 있는 일반사원 기숙사에 2군 선수 몇 명이 들어가서 생활했는데, 정말 죽기살기로 야구를 했던 것 같아요. 1990년 첫해에는 대학팀과 프로 2군끼리 연습게임을 많이 했는데 실전 등판을 해나가면서 투수로서 틀을 조금씩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데뷔 첫 승이 완봉승! 배트맨의 전설이 시작된 지점

테이크백 동작에서 오른팔을 엉덩이 뒤로 떨어뜨리는 김상진의 투구폼 ⓒ두산베어스


그해 말 미국 플로리다 교육리그 참가는 김상진이 투수로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KBO 각 구단별로 유망주 3~4명씩을 보내 연합팀을 구성해 낯선 땅을 밟았는데 김상진은 거기서 새롭게 눈을 떴다.


“당시엔 국내에서 메이저리그를 경험하거나 볼 수 있는 여건이 안 됐잖아요. 플로리다에서 미국팀과 매일 게임을 했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야구를 배웠어요.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던 것과는 다른 부분이 정말 많더라고요.”


현역 시절 김상진의 투구폼은 다이내믹했다. 특히 테이크백을 할 때 오른팔을 엉덩이 뒤로 떨어뜨린 뒤 힘을 모아 던지는 특유의 투구폼이 여기서 완성됐다.


“키는 183㎝로 커졌지만 당시 몸무게는 78㎏으로 여전히 호리호리했을 때였죠.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팔 스윙이 컸어요. 그런 폼으로만 던져야 힘 있는 공을 던질 수 있는 줄 알았죠. 그런데 미국 선수들은 폼이 다양하더라고요. 오른팔을 테이크백 할 때 엉덩이 뒤로 떨어뜨렸다가 던지는 투구폼이 인상적이었어요. 따라해 보니 그게 저한테는 맞더라고요. 몸과 폼이 만들어지는 시기였는데 제 투구폼도 거기서 정립이 됐죠.”


교육리그에서 알을 깨고 돌아온 김상진은 1991년 일본 쓰쿠미 스프링캠프에 초청됐다. 이제는 2군이 아닌 1군에서 싸울 수 있는 투수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990년 이광환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한 뒤 감독대행을 맡았던 이재우 코치는 1991시즌부터 정식으로 OB 새 사령탑에 올랐다. 오랜 미국 생활을 하다 1990년에 2군 코치로 국내에 온 이재우 감독은 김상진을 유심히 지켜보다 1991년 시범경기부터 1군 전력감으로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재우 감독 역시 한 시즌도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1991년 8월 1일 성적 부진(20승4무50패)을 이유로 해임됐다. 콧수염 외에는 OB 팬들에게 인상적인 추억을 남기지 못했지만, 김상진을 발굴한 점은 그가 사령탑으로서 OB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김상진은 1991시즌을 일단 2군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OB가 개막 후 반짝하다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마운드 곳곳이 붕괴되자 이재우 감독은 김상진을 1군으로 콜업했다.


4월 21일 잠실 삼성전. 김상진의 프로 데뷔전이었다. 구원등판해 1이닝 2볼넷 무실점을 기록했다. 패전처리부터 시작해 롱릴리프, 선발투수로 점차 중요한 보직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9경기에서 승리 없이 3패만 기록 중이던 김상진은 5월 23일 잠실 쌍방울전에 선발등판해 마침내 일을 냈다. [베팬알백] 39편의 도입 부분에서 기술했듯이, 9회까지 3안타만 허용한 채 3-0 승리를 이끌면서 데뷔 첫 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9회초 2사까지 단 1안타 1볼넷만 내주는 완벽한 피칭이었다. 4회초 2사 후 김호에게 볼넷을 내주고, 5회초 이승희에게 3루수 앞 내야안타를 허용했을 뿐이었다. 이 안타도 3루수 강영수의 실책성으로 볼 수도 있는 타구였다. 김상진이 9회초 2사 후 조용호와 김호에게 연속안타를 맞자 오히려 강영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 1안타로 끝났다면 자신이 노히트노런을 무산시킨 자책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상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날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졌고, 128구째에 김기태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고 경기를 끝냈다.


무명의 투수 김상진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세상을 향해 확실히 알린 경기였다. 배트맨의 전설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OB는 1991년 아픔의 역사를 썼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KBO 원년 팀 중에 유일하게 시즌 도중 감독 교체가 없었던 OB였지만, 이번엔 거꾸로 최초로 2년 연속 시즌 도중에 감독을 바꾸게 됐다. 윤동균 코치가 이재우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대행을 맡아 선전했지만 1991시즌 최종 성적은 51승2무73패(승률 0.414)로 최하위에 그쳤다. OB 역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꼴찌가 된 것이었다.


1982년 원년에는 OB 모자와 점퍼만 입어도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OB 팬들이었다. 그러나 1990대 초반엔 정반대였다. OB 모자와 점퍼를 입고 나서면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고, 팬들의 어깨는 어딘가 모르게 위축됐다.


낙이 없던 시절, 김상진은 그런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던 OB 팬들에게 자신감과 기대감을 주는 구세주로 떠올랐다.


1990년 OB엔 10승 투수가 한 명도 없었지만, 김상진이 1991년 혜성처럼 등장해 곧바로 10승 투수로 발돋움했다. 32경기(선발 20경기)에 등판해 10승6패1세이브, 평균자책점 3.74를 기록하며 단숨에 에이스로 도약한 것. 1989년 입단한 사이드암 김동현도 그해 10승을 거뒀다. OB는 1991년 꼴찌를 하는 와중에 그래도 10승 투수 2명을 보유하게 됐다.


김상진은 1992년과 1993년 11승씩을 올렸다. 선수단 집단이탈로 난파선이 된 1994년에는 홀로 완투를 9번이나 하며 14승10패7세이브, 평균자책점 2.37을 기록했다. 1992년과 1994년에는 팀 내에서 유일하게 10승 투수가 되며 고군분투했고, 특히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면서 OB를 상징하는 투수로 자리 잡았다. 



●3G 연속 완봉, 한 시즌 8완봉…1995년 배트맨의 신화

1990년대 OB 팬들의 희망이자 자존심의 이름으로 불렸던 '배트맨' 김상진 ⓒ두산베어스


잘 빠진 몸매, 강렬한 투구폼, 배트맨 안경에 턱수염까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캐릭터였다. 박철순 이후 상대를 압도하는 강렬한 에이스를 갈구하던 OB 팬들에겐 김상진이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김상진은 1995년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27경기에 선발등판해 17승7패, 평균자책점 2.11을 기록했다. 다승 공동 2위, 평균자책점 3위. 여기에 탈삼진(159) 부문에서도 3위에 올랐다. 전반기까지만 해도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1위였으나 후반기에 페이스가 다소 떨어진 결과였다.


특히 1995년 그가 써 내려간 완봉의 전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27경기 선발등판 중 절반 가까운 13경기에서 완투를 기록했고, 무려 8번이나 완봉승을 올렸다. 한 시즌 8완봉승은 해태 타이거즈의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만이 유일하게 한 차례(1986년) 작성했던 대기록. 선동열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점에서 김상진은 OB 베어스의 에이스를 넘어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도약했다. 갈수록 마운드가 분업화되고 있는 현대야구에서 한 시즌 8완봉은 앞으로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사이에 나온 3경기 연속 완봉승은 또 어떤가. 5월 11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9이닝 109구 5안타 1볼넷 8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기록한 김상진은 다음 등판인 5월 17일 잠실 삼성전에서 9이닝 114구 5안타 무4사구 9탈삼진 무실점으로 다시 완봉승을 올렸다.


특히 그다음 등판인 5월 23일 잠실 한화전이 압권이었다. 연장 12회까지 혼자 던지며 선발타자 전원 탈삼진을 포함해 17개의 삼진을 잡았다. 아울러 5안타 1사구 무실점으로 한화 타선을 막아냈다. 이날 빙그레는 이상목~구대성~지연규 3명이 등판했다. 연장 12회말 지연규의 견제 악송구로 끝내기 결승점이 나와 OB는 1-0으로 승리했고, 김상진은 3경기 연속 완봉승을 작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김상진의 투구수는 무려 178개. 탈삼진 17개는 해태 선동열의 13이닝 18탈삼진(1991년 6월 19일 광주 빙그레전)에 이어 역대 한 경기 최다탈삼진 단독 2위 기록이었다(훗날 한화 류현진이 2010년 5월 11일 청주 LG전에서 9이닝 17탈삼진으로 김상진과 한 경기 최다 탈삼진 부문 타이기록을 썼다).


3경기 연속 완봉승은 1983년 하기룡(MBC), 1986년 이상군(빙그레)과 선동열(해태)에 이어 김상진이 역대 4번째 주인공이었다. 김상진 이후 송승준(롯데)이 2009년 역대 5번째 대기록을 작성했다.



●‘배트맨’과 ‘삼손’이 맞대결하던 날

OB베어스 김상진과 LG트윈스 이상훈이 맞대결하는 날은 티켓 구하기 전쟁이 벌어졌다. ⓒ두산베어스


“김밥~! 김밥~!”


지하철 2호선 잠실종합운동장 역은 발 디딜 틈이 없는 북새통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김밥을 말아 온 할머니와 아줌마들의 카랑카랑한 외침은 오늘 이곳에 뜨거운 승부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예고탄이었다.


“표 있어요~! 표 팔아요~!”


밀려드는 인파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암표를 거래하는 아저씨들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이미 잠실경기 입장권이 동났음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인터넷과 모바일 예매가 없던 시절, 잠실야구장 매표소 앞에는 표를 사기 위한 팬들이 아침부터 진을 쳤고, 경기가 임박해지면 야구를 보러 오는 팬들로 잠실종합운동장 지하철역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치열했던 시절의 그런 풍경도 아날로그적 낭만처럼 다가온다.


특히 1995년엔 OB와 LG가 시소게임을 벌이듯 선두 경쟁을 벌였다. 하물며 양 팀 에이스의 맞대결까지 예정돼 있으니 입장권 구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지상파 방송까지 생중계에 나섰을 정도로 김상진과 이상훈의 맞대결은 최고의 이벤트였다. 1980년대에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이 최대 라이벌 매치였다면, 1990년대 중반에는 김상진과 이상훈의 잠실 라이벌 매치가 최고 흥행 카드로 떠올랐다.


입장권을 구한 팬들은 복권에 당첨이나 된 것 마냥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고, 자신 바로 앞에서 ‘매진’이라는 푯말을 본 팬들은 세상 잃은 듯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잠실구장 밖의 방송국 중계차 송출 화면이라도 보기 위해 몰려들어 까치발을 하고 경기를 지켜보며 장외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잠실구장 관중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상훈이 몸을 풀기 위해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에 등장하면 LG 팬들은 “이상훈! 이상훈!”을 외쳤고, 맞은 편의 김상진이 OB 점프를 입은 채 러닝을 시작하면 OB 팬들 역시 이에 질세라 “김상진! 김상진!”을 연호하며 맞불을 놨다.

평소엔 경기 후반에나 파도타기 응원이 시작되지만, 김상진과 이상훈이 맞대결하는 날에는 미리 흥분한 팬들이 경기 초반부터 파도타기 응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네 편 내 편’도 없었다.


때론 1루 응원단에서, 때론 3루 응원단에서 파도가 시작되지만 파도는 끊어지지 않고 2바퀴, 3바퀴, 어떤 때는 4바퀴, 5바퀴씩 돌기도 했다. 야구를 보러 온 것인지, 파도타기 응원을 하러 온 것인지, 3만 관중이 운집한 잠실야구장 관중석에는 거대한 파도가 팬들의 함성과 함께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고 밀려갔다.


그때도 “LG 바보”, “OB 꼴찌”라는 양 팀 팬들의 응원 목소리가 야구장 안에 메아리치기도 했지만, 1995년에는 양 팀 모두 1위 싸움을 하는 팀으로 변모한 터라 ‘바보’도 아니었고 ‘꼴찌’도 아니었다. 그저 내 흥에 겨워서, 상대의 기를 꺾고자, 팬들이 습관처럼 내지르는 구호였다.


'야생마'로 불린 LG 투수 이상훈 ⓒKBO


김상진과 이상훈은 그해 3차례(5월30일, 7월4일, 8월13일)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그런데 그 빅매치에서 모두 이상훈이 승리했고, 김상진이 패전투수가 됐다. 7월 4일 두 번째 맞대결에서 2-1로 박빙의 완투 대결을 펼치기도 했지만, 나머지 2경기에서 김상진은 부진했다.


그해 이상훈은 20승을 거뒀다. 둘의 맞대결 결과를 빼면 김상진이나 이상훈이나 17승. 결국 이 3차례의 맞대결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가정이지만 만약 김상진이 3승을 하거나 2승1패를 했다면 다승왕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상진으로선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치고도 친구 이상훈과 맞대결에서 모두 패한 것이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김상진은 “왜 안 물어보나 했다”며 웃음부터 터뜨렸다.


“상훈이도 물론 성장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죠. 그래도 상훈이는 서울고-고려대를 나오면서 나름 야구 엘리트 코스를 밟았잖아요. 저는 늦게 야구를 시작해 기본기를 제대로 못 배우고 야구를 했죠. 상훈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입단했고 저는 배팅볼 투수로 시작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그런 부분에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도자가 되니까 알겠더라고요. 삼진 잡는 재미, 팬들이 환호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면서 나 혼자 야구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상훈이랑 붙을 때 그런 게 더 표출되지 않았나 싶어요. 상훈이를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나쳐 과욕이 된 거죠. 나 스스로를 압박하고 옥죄었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평정심과 밸런스가 무너졌던 것 같아요. 그때는 지고 나면 잠도 못 잤죠. 그래도 지나고 보니 불꽃같은 시즌이었어요. 그해 반게임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하고 한국시리즈도 7차전까지 가서 우승을 하고…. 팬들께서는 어떻게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정말 꿈같은 시절이었죠.”


김상진과 이상훈은 잠실 라이벌 구단의 에이스로서 자존심 싸움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승부를 떠나면 절친한 친구였고, 야구장 밖에서 따로 만나 밥도 먹는 그런 사이였다.



2 배트맨 기다리며

김상진은 경기 수훈선수 인터뷰 단골손님이었다 ⓒ두산베어스


김상진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또 하나를 꼽자면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 선발등판이었다. 6차전까지 롯데 자이언츠와 3승3패로 맞선 가운데 김상진은 절체절명의 최종 7차전 선발로 나서 6이닝 3안타 2실점(1자책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팀 우승을 이끌었다.


OB로서는 박철순이 에이스로 활약한 1982년 이후 13년 만의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김상진에 이어 권명철이 등판해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4-2 승리를 마무리했다. 김상진-권명철과 배터리를 이뤄 승리를 리드한 포수는 5년 전 스프링캠프에서 김상진에게 “직구 좋은데 왜 자꾸 너클볼 던지느냐”고 조언했던 바로 그 신인 포수 김태형이었다.


김상진은 OB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1998년 12월 30일 6억5000만원에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됐다. 공교롭게도 OB 베어스는 김상진이 떠난 뒤 1999년부터 두산 베어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말하자면 김상진은 ‘OB 베어스 시대의 마지막 에이스’였다.


통산 성적은 122승100패 14세이브, 평균자책점 3.54. 50번의 완투와 17번의 완봉을 기록했다. OB에서 88승, 삼성과 SK에서 34승을 올린 뒤 2003년을 끝으로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2004년 해설위원을 거쳐 2005년부터 2019년까지 SK와 삼성에서 코치생활을 하다 2000시즌을 앞두고 두산 베어스에 복귀했다.


20대의 끝자락에서 OB를 떠난 베트맨은 22년을 돌고 돌아 50대의 나이에 두산으로 돌아왔다. 현재 이천베어스파크에서 ‘제2의 배트맨’이 될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배팅볼 투수로 출발한 그이기에 누구보다 퓨처스 투수의 심정과 사정을 잘 알고 있다.


OB베어스의 전설 김상진은 2020년 두산베어스 투수코치로 복귀해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PS) 배트맨 안경 관하여


김상진의 별명은 ‘배트맨’이다. 배트맨 안경을 쓰고 마운드를 호령하면서 이 같은 별명이 붙었다. 그가 배트맨 안경을 쓴 것은 처음엔 시력 때문이었다. 1군 첫해인 1991년 10승을 올리기는 했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야간경기 때 포수 사인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서 1992시즌부터 배트맨 안경을 착용하게 됐다. 당시 국내에 그런 형태의 안경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선글라스용으로 나온 고글이었다. 사각 모양의 안경테는 격렬한 투구를 해도 잘 흘러내리지 않았다. 시야도 탁 트여 넓게 보였다. 그래서 안경테는 그대로 두고 렌즈만 도수를 넣어 교체했다.


“처음엔 안경테가 넓어 보기 편해 썼는데 나중에는 마운드에서 좀 강인해 보이고 싶기도 해서 계속 착용했어요. 당시 턱수염도 길러서 좀 건방져 보였죠. 사실 1980년대만 해도 야구선수가 수염을 기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제가 배트맨 안경을 쓸 즈음부터 사회적으로도 개성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과감하게 배트맨 안경을 쓰고 턱수염을 기를 수 있었죠. ‘배트맨’이라는 별명?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건 김상진이라는 투수가 팬들에게 뭔가 각인이 됐다는 뜻이고, 팬들이 인정을 해주고 있다는 의미잖아요.”


배트맨 안경을 벗고 턱수염을 깎은 ‘전설의 투수’ 김상진이 1990년대를 회상하며 들려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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