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파리의 리옹역에서 테제베(TGV)를 타고 벨포르(Belfort)로 갑니다. 벨포르에서 버스로 국경을 넘어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들어갈 참입니다. 테제베라는 이름이 귀에 익습니다. 우리나라가 고속철도 건설 사업을 할 때 선진국 고속철도 기술을 도입하는 문제로 매스컴에 자주 오르던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이체(ICE), 일본의 신깐센 그리고 프랑스의 테제베. 그중에 우리나라는 테제베를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어이 없었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한국에 올 때 우리가 테제베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감사 인사로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영구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한 사실입니다. 우리 것을 우리가 빌려 쓰게 된 것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기술로 생산되는 KTX가 외려 프랑스 테제베에 기술을 이전해야 할 느낌이 들 정도이어서 우리 기술 발전에 감개무량합니다.
벨포르에서 검열 하나 없이 사뿐히 국경을 넘었습니다. 오늘 밤을 보낼 인터라켄으로 달립니다. 프랑스의 자연과 이곳의 자연의 차이는 수평수직입니다. 프랑스의 넓은 평원을 방금 지나온 터라 스마트폰 화면을 가로 세로로 자동변환하는 기능처럼 내 눈과 뇌는 세로로 자동변환되어 돼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두 눈이 완만한 평지와 구릉을 오갔는데 스위스로 들어오니 눈이 호수-언덕-산-하늘 세로로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집에서 점점 올라가 하늘을 만나면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눈이 혼자서는 표현을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입으로 하여금 연방 우와우와 ~ 감탄사를 터트리게 합니다. 집들은 푸근하게 나무로 지어졌고 처마는 지붕에 연이어 길쪽하게 뻗어 나와 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밤새 쌓인 눈 때문에 아침에 문을 열지 못하면 눈이 녹을 때까지 집 안에 갇힐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놀라운 것은 집 주변으로 나있는 넓은 언덕의 풀밭이 너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평지의 목초가 아니라 경사가 있는 언덕인데도 몇십 킬로미터를 달려도 정갈함이 한결같습니다. 집 발코니에 놓인 화분들의 화초도 시든 것 하나가 없습니다. 관광산업을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라켄은 독일어로 '인터(inter 사이, 중간)'와 '라켄(lake 호수)'을 합한 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호간읍(湖間邑)'이라는 뜻입니다. 인터라켄은 스위스 중부 베른 주 남동부에 있는 튠호와 브리엔츠호 사이에 위치한 인구 5천 명 남짓의 소도시입니다. 이곳에 관광객이 모여드는 이유는 두 개의 아름다운 호수를 연못 삼아 낮은 구릉과 높은 언덕 위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들이 빚어내는 평화로운 정경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경치는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늘과 땅과 물의 조화입니다. 하늘은 하늘의 몫이지만 땅과 물은 사람의 몫입니다. 땅 위의 집과 길과나무 그리고 강과 호수와 바다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스위스는 땅과 물을 다스렸습니다. 하늘과 석회성분이 많은 호수물은 신비스러운 빛을 내며 사람이 다듬은 것들을 푸근하게 끌어안고 있습니다. 손댈 수 없는 곳에 맞추어 변모가 가능한 곳을 조화롭게 말입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인터라켄으로 관광객들이 모이는 더 큰 이유는 바로 인터라켄역에서 융프라우 산으로 올라가는 산악열차를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인들에게 산이란 무엇일까요. 알프스산맥이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룬 커다란 호수 때문에 농경지는 국토의 25% 정도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겨울이 길어서 농작물을 제대로 경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의 스위스는 늘 가난하고 배고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스위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최고인 초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수천 년 가난에서 벗어나 1인당 국민소득이 최고인 나라가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겁니다. 험준한 산악이 주는 역경을 극복한 것입니다. 극한의 환경은 스위스인들에게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요구했습니다. 최고의 산악전사가 된 그들의 전투력은 막강했습니다. 용병으로 인기가 있었던 그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 루이 16세의 근위대로서 최후의 한 명까지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한 전사 중에 전사들이었습니다. 신의의 대명사가 된 스위스 용병들은 곧 신의의 대명사 스위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轉禍爲福이 된 셈입니다.
프랑스의 앙리 4세는 낭트칙령으로 가톨릭국가 프랑스에서 개신교도인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그러나 손자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으로 할아버지 앙리 4세의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철회하였습니다. 위그노들은 종교탄압을 피해 프랑스 밖으로 탈출하였습니다. 탈출한 위그노들 2만 5천 명 중에는 실크직조공, 시계공, 은세공사,유리제품공, 열쇠와 자물쇠제작자 그리고 가구 산업에 숙련된 기술자 상당수 있었습니다.
추방당한 위그노 중에서 은행업자들도 많았습니다. 루이 14세 이후 전 세계에는 다수의 왕위계승전쟁과 혁명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신변이 불안해진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맡길 도피처가 필요했습니다. 신용국가 스위스의 위그노 은행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자신이 추방한 스위스 위그노에게서 비밀리에 사치생활비용과 전쟁비용을 빌린 루이 14세의 비밀유지 요구 이후 고객정보 비밀유지원칙을 고수하는 스위스 은행이야말로 세계은행이 되는 호황을 맞은 것입니다. 20세기 중반 히틀러의 박해를 받은 유태인들은 게토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그들의 재산을 스위스 은행에 맡기는 주 고객이 되었습니다. 유태인들의 돈이 탐난 히틀러는 스위스 은행에 유태인 계좌 정보를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비밀을 유지하는 원칙을 법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산악열차가 그린델발트터미널에 도착하면 클라이네샤이덱역을 거쳐 아이거익스프레스 곤돌라에 탑승하여 융프라우요흐로 올라갑니다. 곤돌라를 타고 급경사 케이블에 매달려 수목한계선을 넘어 고산지대로 본격적으로 올라갑니다. 도중에 아이거를 만났습니다. 수많은 산악인들의 범접을 허용하지 않고 웅장하게 서있는 모습에서 고용병으로서 폭도들의 침입에 맞서 교황을, 황제를 죽음을 불사하고 지키던 스위스 산악 전사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곤돌라쪽에서 아이거의 깍아지른 절벽 북벽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다행입니다. 노스페이스(NorthFace)라는 스포츠웨어 로고가 왜 그런 모양을 갖게 됐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거북벽을 왼쪽에 두고 곤돌라는 계속 올라갑니다. 이제 융프라우요흐에 도달하게 됩니다.
융프라우와 묀히 두 봉우리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한 융프라우요흐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이 있습니다. 백두산보다 훨씬 높은 해발 3,454미터입니다. 융프라우요흐는 융프라우 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럽의 지붕이라 불립니다. 이곳에 스핑크스라는 이름의 전망대가 있고 매점에서는 메이드인코리아 S컵라면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세계 어딜 가나 한국인 관광객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외국인 중에도 컵라면을 들고 시원한 국물을 즐기는 이도 있습니다. 이제 그만큼 살만한 나라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혁명이란 배가 고픈 자들이 또는 배가 고픈 자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세상을 바꾸어 보겠노라고 분연히 일어서는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배가 고프다는 것은 이성과 문화를 뛰어넘는 욕구를 촉발합니다. 역사란 수많은 민란과 혁명의 물줄기가 이어져 강물을 이룬 연대기일 것입니다. 여행이란 자신에 대한 자신의 혁명이 아닐까 합니다. 가슴과 머리가 고파서 떠난 혁명입니다. 혁명을 하며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안 보이던 곳들이 보이고 느껴집니다.
이국의 설산에서 컵라면을 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말로만 듣던 중립국 스위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게 국제사회라면 누구나 중립국 선언을 했을 겁니다. 중립국을 선언한 벨기에는 2차 대전에서 히틀러의 침략을 당했지만 스위스는 끝까지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끊이지 않는 전쟁에 휘말린 유럽세계에서 강대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오스만, 러시아, 독일 등이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에서 스위스는 영구중립국을 선언하며 자국 방위 이외의 어느 전쟁에도 휘말리지 않겠다는 공언을 하였습니다. 물론 지켜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해방정국 혼란기에 정치권에 하수인 노릇을 하던 주먹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활동하는 외로운 주먹꾼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이성순 씨였습니다. 스라소니는 고양잇과 동물로 표범과 대적할만한 먹이사슬 상위권의 동물입니다. 아무도 이겨낼 수 없는 주먹을 가지고 있었으니 '스라소니 이성순'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스위스가 스라소니가 아니라 사슴이나 토끼 같은 나라로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어도 중립국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파리에서 로마에서 관광상품을 파는 상인들이 한국어 인사말과 가격흥정에 필요한 한국말을 압니다. 싸다싸 사라빨리사 느즈면모싸~. 그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 언어를 국어로 하는 언어분포를 보면 압니다. 희랍어, 로마의 라틴어, 중국어, 스페인어, 영어. 드라마 오징어게임으로 이제 외국인들은 한국식 욕도 곧잘 하는 세상입니다. 스파게티, 피자처럼 컵라면의 매콤한 맛에 환호하는 세상을 염원합니다.
스핑크스 전망대 밖으로 나와 융프라우와 마주하고 섰습니다. 절대로 곁을 내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같고 어서 오라고 재촉하는 것도 같은 묘한 감정에 싸였습니다. 갈수만 있다면 가보고 싶다는 마음, 반드시 가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스위스를 오늘의 스위스로 만들었고 아이거북벽을 기어오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때론, 여행이란 자신의 희끄무레한 과거를 찾으러 다시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적이 있는 도시들은 맘이 동하면 또다시 찾을 수 있지만 이곳은 내 생에 다시 오기 힘든 곳입니다. 바닥의 눈을 집어 들어 맨손으로 꼭꼭 뭉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