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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Dec 28. 2023

박정희 : 김재규 = 시저 : (    ?     )

영화 <서울의 봄>이 제시하는 킬러문항



2부작 서울의 봄

1부 : 1979년 10월 26일 <서울의 봄>
        출연 박정희 : 김재규 = 카이사르 : 브루투스
2부 : 1979년 12월 12일 <서울의 봄의 꽃샘추위>
        출연 장태완 : 수도경비사령부  = 전두환 : 보안사령부


1부 : <서울의 봄>


故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5793일을 대한민국의 최고통치자로 살았습니다. 대통령직 말기에 해당하는 1972년 12월 27일은 유신헌법이 제정된 날이었고,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긴급권으로써 모든 헌법 조항을 정지할 수 있는 독재권을 부여한 법이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것도 그의 통치기간 중이었고 민주인권탄압으로 온 국민이 불안해했던 시기도 그때였습니다. 본인이 연설할 때  "후세의 역사가들이 나를 제대로 평가해 줄 것입니다."라고 자주 말했었는데 그의 사후 거의 4 반세기가 지난 시점입니다. 그가 말한 '후세의 평가'는 평가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가 나아지고 잘 살게 되면 그가 이룬 경제발전보다는 인권탄압이 관심을 받을 것이고, 경제 침체기에는 국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위대한 통치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2년 전에 작심하고 읽었던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출판사, 김택현 번역 34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크로체(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당대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 왜냐하면, 만일 역사가가 평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1910년 미국의 역사학자 칼 베커(1873-1945)는 일부러 도전적인 언사로 '역사의 사실들은 역사가가 그것들을 창조할 때까지는 그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에 근거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살만한 나라라는 뜻이 됩니다. 짧으나마 그가 어떤 죽음을 죽었는지를 알아보고 되돌아보는 것이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관객을 동원하게 됐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나의 대학2학년 시절이었던 1979년 가을과 겨울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사건 이후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이 더해졌고 또 그때는 어려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볼 수 있고 또 그때 보였었더라도 이제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 중에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왜 대통령을 쏘았을까요?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생,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926년생으로 9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경상북도 구미를 고향으로 하는 동향인이었습니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은 형과 아우처럼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1972년 유신헌법이 공표되었고 유신정권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반정부운동이 국내외적으로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은 높았습니다. 특히 인권탄압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대로 가면 나라가 뒤집어질 것이라고 중앙정보부장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구집권을 꿈꾸는 대통령을 제거하면 독재자의 죽음에 환호하여 자신에게로 권력이 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김재규 부장은 국내 최대최고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으로서 사태의 심각성을 수차례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지만 중앙정보부의 과실이 크고 부장이 너무 물렁해서 그렇다는 대통령의 질책이 잦았습니다. 게다가 질책을 받는 자리마다 동석한 8세 연하의 차지철 경호실장이 시어머니보다 더 미운 시누이 역할을 너무 헌신적(?)으로 잘 해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CIA는 그에게 꿈을 주었고 차지철은 그에게 결단력을 주었습니다.



영양가 높은 음식일수록 상하면 그만큼 강한 독성을 갖듯이 애정이 변하여 증오가 되면 애정의 강도만큼 증오도 큰 법입니다. 애증(愛憎)은 같은 탱크에 담긴 화약과 같습니다. 유신정권말기에 정치체제를 반대하는 전국적인 분위기 속에 10월 16일부터 4일간 들불처럼 번졌던 부산마산민주항쟁으로 대통령으로부터 큰 질책을 받아 수류탄이 된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차지철 경호실장이 안전핀을 뽑아버렸습니다.



사건 당일인 1979년 10월 26일에 삽교천 준공식이 있었습니다. 행사장으로 가는 대통령의 헬기에 함께 가려고 탑승하려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차지철 경호실장이 "자리가 없으니 타지 말고 당신 자리나 잘 지키시오"라고 하는 말을 듣고 큰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헬기에 타고 있던 대통령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해 보고만 있었습니다. 하늘로 날아가는 헬기를 망연자실 바라다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대통령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만큼 믿고 따랐는데 그 사랑했던 님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니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나라'는 증오의 심정으로 변했을 겁니다.



지금도 논란이 되어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대통령 살해 후 왜 김재규 부장은 자신의 부하들이 있는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갔을까, 이미 죽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살해했고 자신은 그 자리를 수습했다면서 나중에 자신이 말한 혁명의 길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성공으로 가는 길을 마다하고 왜 딴 방향으로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하들이 하나도 없는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무장해제 당하고 보안사령부 요원에게 체포되어 보안사령부 분실로 끌려가서 고문 속에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점이 바로 김재규 중정부장이 대통령을 증오해서 죽였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으려고 계획적으로 일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했던 만큼 순간적인 증오의 마음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늘 차지철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한 번의 생각은 두렵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지만 매일 하는 생각과 환상은 그에게 숙명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가 사형을 당하기 전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했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습니다."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은 맞지만 그가 어떤 야수의 심정을 가지고 쏘았는지는 본인만 알 뿐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영원히 의문으로 남을 일입니다.




로마의 공화정의 종신독재관 율리우스 시저는 종신독재관이라는 직위가 말해주듯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평생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기어코 황제에 오르려다가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브루투스도 김재규처럼 구체적인 후속계획이 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처럼 브루투스의 시저 암살은 너무나도 허황된 낙관적인 예측에 근거한 암살이었습니다.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결행된 일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브루투스는 정의감이나  분명한 뭔가 해야 한다는 명분을 가졌던 게 아니었고 매제인 롱기누스가 주동이 된 시저의 황제 즉위 의도를 막아 공화정을 존속하게 하는 일에 찬동했을 뿐이었습니다. 독재자를 죽이면 사람들이 독재자의 죽음에 환호하여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자연스레 돌아올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암살자들의 공통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브루투스가 그랬고 김재규가 그랬습니다. 김재규는 보안사령부 지하 철창에 갇혀 수사관들에게 수시로 물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연락이 없었나?" 자신의 '영웅적인 행동'에 미국도 박수를 쳤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때는 박정희 정부의 인권탄압을 강하게 규탄하고 한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지미카터가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시저는 잘 알려진 천하에 바람둥이였습니다. 이집트 총독이었을 때에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아들 케사리온을 낳았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콧소리 섞인 소리로 "우리의 아들 케사리온이 당신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는 걸 보고 죽을 것입니다. 어서 황제에 오르시오."라고 부추기기도 했었습니다. 시저는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었고 시저는 자신의 애인  중 하나였던 여인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시그문드 프로이트는 어머니를 두고 아들은 아버지와 경쟁관계에 있다고 하는 심리용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만들어냈습니다.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인 데는 어머니를 '빼앗아 간' 남자를 죽이고자 하는 복수심이 일부분 작용했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와 프로이트의 시대는 시간적으로 몇 백 년의 간격이 있어서 셰익스피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용어는 알지 못했지만, 비극 작품의 대가인 셰익스피어가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프로이트 보다 깊이 있게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는 그 유명한 대사 "E tu Brute 에 뚜 부루떼"가 시저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옵니다. 시저가 공화정 지지파들의 하나인 양아들 브루투스의 칼을 맞으며 하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단말마의 비명입니다. 또 브루투스는 양아버지 시저의 장례식에서 "나는 시저를 사랑하지 않아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죽였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시저의 심복부하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등장하여 암살자 무리들을 한마디로도 공격하지 않고 시저의 유언장을 공개합니다. 유언장에는 시저 자신의 전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남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브루투스와 암살자 무리들은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로마를 떠나게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브루투스는 시저의 양아들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극적 효과를 노려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상황으로 만든 것입니다. 시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E tu Brute 에 뚜 부루떼"도 역사기록에는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창작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재벌그룹의 회장이 연말을 맞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기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룹의 규모에 비해 성금이 너무 초라하다는 것과 성금에 진실성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장은 말합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나는 돈을 냈고 내 돈으로 불우한 사람들이 행복해졌지 않습니까.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용감한 대답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서는 브루투스를 '고결한 애국자'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배경이 되어주고 출세의 길을 열어준 은혜를 배신으로 갚았지만, 동기가 어떠했건 독재자를 막으려 했던 행위는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겠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살해사건이 재조명 된다는 얘기들이 있기도 합니다. 동기가 어떠했든 자신에게 벼슬을 주어 승승장구하게 했던 대통령을 죽인 자였지만, 배신의 아이콘 가롯유다를 보는 눈으로 볼 게 아니라 <서울의 봄>을 가져온 행위만으로 볼 뿐이라는 것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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