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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Jul 15. 2024

불량품들의 사계

우리는 급이 필요 없다 118

 우급이 필요 없다



        

살구꽃이 마당에 날아든다. 풀치와 성길 씨 다투는 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왔다. 성길 씨가 풀치한테 “왜 허구한 날 술 마시고 새벽부터 남의 집 앞에서 난리 치냐”라고, 아침부터 말씨름하고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성길 씨가 왜 난리일까!

성길씨가 “옆집 나와보세요” 나를 불렀다. 나가기 싫었지만 일단 문을 열었다. 반취반성 낡은 등산복 바지를 입은 풀치는 혀가 반 꼬여 있고, 성길씨의 머리에는 새집이 네 채나 지어져 있다. 이 와중에 풀치는 나를 보자 이가 없는 입으로 함박꽃을 피었다.

결혼을 못 했는지 안 했는지 인생 역정이 희미한 인간 셋이 아침부터 이러고 있다는 게 참말로 한심했다. 날마다 뭔 짓거리인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 속에 내가 서 있다는 것에 더 열이 났다.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속이 지랄을 떨고 있었다.      


“덕풍시장에 파마 싼데 알아놨어요. 이번 주 일요일 엄마 모시고 미용실 가요” 성길 씨는 어차피 택시비를 주느니 그 돈을 나를 주고 내 차로 편안하게 가겠다고 했다. 성길씨는 거리로 만 계산한다. 시간으로 치면 몇 시간인데. 다음부터는 시간으로 하자고 말을 해야겠다.


나는 일요일에 가겠다고 대답을 하고 얼른 들어와 씻었다. 부츠에 집어넣은 신문지를 꺼내고 구둣솔로 닦았다. 언제 입었을까 바바리를 빼입고 오금동 점심이네 집으로 갔다.     

“언니 뭔 일이래? 어디 갈라고?”

“점심아! 내가 열받아서 차려입고 나왔어야. 염병 나는 즈그들하고 급이 다른 디 한 묶음으로 취급 헌당께.”

전후 사정을 듣고 있던 점심이가 말했다.

“하하 언니도 참. 밥이나 먹자.”

“너도 생각 한번 해봐라, 머리에 새집을 얹은 인간들이 아침부터 무슨 지랄 옆차기인지. 오늘 저녁 새들이 머리에 알 안 깔라나 몰라. 그 집에서 이사 나올 수도 없고”

헤어지기 싫어도 어차피 이사 갈 판이기는 한데. 내일부터는 날마다 세수하고 집에서도 옷 차려입고 있으려고 맘먹었다. 내 성격에 며칠 갈까만은 한번 해 보려고 다짐했다.

그런데 급으로 치면 나는 몇 급이나 될까?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완전 빈털터리였다.

      

“아따! 그러고 보니 나도 무급이구만!”

생명에 등급이 있을까. 인간의 무대에서 무리 지어 살다 보니 은연중에 급이 생겨버렸다. 이제 집은 등기 대장이나 법으로 가 아닌 거처가 부의 등급이 되어 버렸다. 무리생활을 접으면 그걸로 끝이 나겠지만 그전까지는 어림도 없다. 물론 호칭은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김씨, 이씨, 누구씨 보다는 국장, 이사, 상무, 전무, 회장, 박사, 그 말 많은 본부장 호칭은 듣기 좋은 당연한 말이 되었다.


냉이가 저 깊은 우주를 뚫고 내 앞마당까지 솟아 나왔다. 냉이에겐 고작 고양이 발바닥만 한 공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와 성길 씨와 풀치도 마찬가지다. 아무 곳에서나 뿌리를 내렸다 거둬들일 줄 아는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아닌가.

  

누구는 나보고 집 꼴이 이래도 품격 있게 살라고 했다. 그 품격이 나에게 무엇일까.

하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유기묘, 유기견과 채송화, 질경이, 벼룩이자리, 좁쌀냉이, 돌나물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것들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보듬어 안고 정화시킨다. 그것들은 내 안에 더럽고 추접스러운 것들을 씻어내는 푸른 필터들이다. 내 그림자에 가려진 그것들을 위해 나는 옆으로 물러선다.

품위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비켜 서주는 한 발자국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바람 아래 헛것들처럼 지상 위를 스쳐 지나간다. 풀치와 성길씨도 마찬가지다.

삶이 불투명한 희미한 그림자에 급수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고 있다. 주먹밥 같은 우리 세 사람에겐 어느새 살고 팔 수 없는 기억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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