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부조리함을 겪어내면 더 이상 생(生)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냥 장밋빛처럼 긍정할 수 없다. 그럴 때 나를 보호하기 위한 손쉬운 선택지는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허무주의자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차피 삶이란 의미 따위 없는 것이니 이뤄내지 못한 것에 대해 괴로움과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된다.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이런 허무주의에 빠진, 주인공 에블린의 딸(조이)이자 멀티버스 세상 속 악의 축인 ‘조부 투파키’가 등장한다. 다중우주(멀티버스) 세계관은 서로 평행한 우주가 다수 존재하며 그 안에서 ‘나’라는 존재 역시 무수히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에 기반한 세계관이다. 조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지 않는 상처의 경험들로 삶에 좌절감을 느껴서, 조부 투파키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 도덕적 관념을 잃어버려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래서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해 ‘부질없음’을 상징하는 베이글, 블랙홀을 만든다.
딸(이라고 일부 부를 수 있는)인 조부 투파키가 허무주의의 전형이라면 이에 대척점에는 남편(이라고 일부 부를 수 있는) 웨이먼드가 있다. 에블린이 현 우주에서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 남편은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에 마냥 세상을 밝게 보는 사람인데, 멀티버스에서는 조부 투파키로부터 우주를 지키려는 사람이다. 다정함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웨이먼드는 베이글을 반전시킨 구글리 아이즈를 온갖 데(특히 에블린의 공격성이 드러나는 물건들) 붙여놓고 다닌다.
다중우주 속 이들은 무수히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빨래방을 운영하는, 다중우주 속 가장 실패한 듯 보이는 에블린에게 나타난다. 이들은 왜 굳이 가장 패배자의 삶을 사는 에블린을 찾아왔을까?
웨이먼드가 다중우주를 지키기 위해 가르쳐 준 버스 점프(다른 우주로 이동하는 방법)로 인해 에블린은 원치 않게 다른 우주 속, ‘현재의 자신’이 되는 선택을 하지 않은 자신을 마주친다. 현생이 시궁창일 때, 다른 우주로 넘어가는 버스 점프를 할 수 있다면, 게다가 그 삶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면 과연 이 생을 긍정할 수 있을까? 조부 투파키가 에블린을 찾아다닌 이유다.
‘(실패자인) 당신이라면 (내 허무함을) 이해할 것 같았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삶을 종적으로 바라보든 횡적으로 바라보든 우리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어쩌면 착각일 수 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의 고민, 갈등, 충돌,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어떠한 삶에도 끊임없이 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삶을 조금은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뿐 아니라 나와 관계를 맺는 모두가 이러한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다는 공통점에 주목한다면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웨이먼드가 선택한 전략적 다정함이 이러한 태도일지도.
전략적 다정함을 탑재한 에블린은 자신의 가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딸 조이를 긍정하며 받아들인다.
“뭐든 될 수 있고(everything) 어디든 갈 수 있는데(everywhere)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엄마 딸의 모습이 안 이런 곳,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의 시간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조이에게 에블린은 말한다.
“그럼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절대적 진리는 없다’라는 말은 최고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내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원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다 부질없는 거잖아” 그렇게 허무주의를 전략적으로, 능동적으로 극복해 나가며 영화는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