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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한 Feb 20. 2023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원치 않은 대학 그리고 어쩌다 휴학

하루종일 방에서만 지냈다. 친구들의 부름에도 나는 응하지 않았다. 응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게 대학이야기를 꺼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가 그들보다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시기에 인터넷방송과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을 정주행 했다. 친구들은 이 시기에 운전면허증을 취득을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알바를 해서 용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것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내 인생을 의미 있게 살고 싶지 않았다. 탄로 난 나의 모습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은 망했어.' 자포자기하며 방 속 깊숙이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부모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 생각했는지 일본여행을 권해주셨다. 나름 졸업선물이었다. 그렇게 동생이랑 홋카이도 패키지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1박 2일 신입생 OT 일정과 여행일정이 겹쳤다. 학교 측에서는 불이익을 강조했다. 어떤 불이익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겁이 났다. 하지만 이미 비용을 지불했고 가고 싶은 대학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그들이 말하는 불이익을 받고자 했다. 시작부터 학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OT가 도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집에서 차 타고 두 시간 반정도 걸리는 지역으로 유학을 떠났다. 문과였던 내가 공대생이 되었다. 그것도 전문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은 한 정약용 선생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공감을 할 수 있어서 오묘했다. 개강하기 이틀 전부터 기숙사가 열렸다. 나는 첫날부터 입사를 했다.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교정을 이곳저곳 살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산을 깎아서 땅을 다지고 건물을 세웠다. 그래서 학교초입부터 기숙사까지는 완전 끝에서 끝이고 걸어서 20분은 족히 걸렸다. 그리고 산지라 음기가 가득했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렇게 학교를 구경하고도 하루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그 시간에 나는 홀로였다. 나는 왜 이곳에 있을까? 현실을 부정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조차도 나를 다독여 주지 않자 나는 결국 아무도 없는 3인실 기숙사에서 울며 시간을 보냈다.


전문대는 양아치 소굴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교실에서 맨뒤에 엎드려 자고 있는 친구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오히려 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니 언행불일치였다. 기숙사는 동갑인 친구와 곧 졸업하는 선배와 함께하게 되었다. 동갑인 친구와는 룸메이트였지만 친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불순한 시선으로 보기에 그 또한 양아치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관심은 외모가 선한 선배에게로 갔다. 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같은 과 선배였다. 나는 그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한 세계가 열린 듯했다.


대기업은 명문대의 산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전문대에서도 대기업을 많이 간다고 했다. 생산직이라고 하면 전문대와 더불어서 고등학생 때 열심히 하지 않은 친구들이 가는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산직이 대기업에도 있다고 하니 놀라웠다.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내가 살던 곳은 연구단지와 인접한 지역으로 친구들의 부모님이 연구원이나 선생님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대기업 생산직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리고 생산직에도 급이 있다고 했다. 석유화학회사가 으뜸이라 했다. 그 선배도 마찬가지로 대기업 생산직이라 했다. 인상도 좋고 학점도 좋고 자격증도 많은 선배가 이야기해 주니 신뢰가 갔다. 어쩌면 이곳에 온 것이 나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나마 하게 되었다.




전문대는 2년 안에 80학점을 이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수업시간표가 빡빡하게 구성이 되어있다. 그리고 수강신청도 없이 과에서 그냥 시간표를 정해준다. 마치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첫 주차부터 나는 대학 로망에 대해서 확 깨지는 경험을 했다. 현실과 이상이 너무 달랐을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진법변환 쪽지시험이었다. 내용도 고등학교 수준인 데다가 꽤나 많은 사람들이 버거워하고 있었다. 너무 시시했다. 그리고 뒤에서는 끝나고 피시방 가자고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지식을 탐구하는 대학에서도 고등학생들이 할법한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전문대에 대한 편견이 쌓여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학교에는 이상한 전통이 있었다. 군대 간다고 입학하자마자 3월에 휴학을 한다는 것이었다. 전문대가 보통 2년제이다 보니 1학년 마치고 군대 가고 복학하면 그 흐름이 끊긴다는 이유였다. 군대 갔다 와서 1학년부터 다시 스트레이트로 쭉 공부하면 학점 따는 것도 수월하다고 했다. 다른 이유보다 나는 이 학교를 떠날 수 있는 명분을 챙길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선배 덕분에 대기업 생산직이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대학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면 그냥 안 갔다고 했다. 그리고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는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항상 피해 다녔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문과에서 나와 같은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도 지방 4년제 대학으로 갔다. 그런데 나는 전문대라니 저절로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 학교의 전통이 달가웠다. 나의 신분은 아직 이 대학에 학생이지만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야.'라고 자기위안했다. 또한 벗어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이다. 이성계와 같이 나는 다시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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