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든든한 나무친구
3년 전 강원도 홍천 시골마을에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미국에 며칠간 연수 갔을 때 단층건물의 잔디 깔린 마당이 있는 회사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이런 멋진 사무실이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다녀오고 불과 몇 개월 만에 시골마을 한가운데, 마당이 있는 근사한 사무실에 입주하게 되었다.
사무실 창문으로 보이는 논과 밭은 일 년 내내 버라이어티 한 뷰를 선사해 준다. 옥수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내 키보다 더 많이 자라고 벼의 사계절은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가을이 되면 창밖에서 들깨냄새가 진동을 한다.
계약을 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마당 초입 길가에 살구나무가 하나 서있다. 이 나무그늘 아래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사계절을 나신다. 어르신들은 80대 후반에서 90세에 이르는 나이로 새벽에 농사를 짓고 햇살 뜨거운 낮이 되면 그늘 아래 모여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담소를 나누신다. 매일 모여도 할 이야기가 그렇게나 많은지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듣기 좋다.
살구나무는 앞집의 올해 93세 이한순 할머니가 심은 나무라 한다. 둘째 아들네 손주를 업어서 재우는데 그늘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쉬워 바늘만큼 작은 나무를 하나 얻어다가 심었다고 하셨다. 그 나무가 자라 소중한 마을의 쉼터가 되어 있으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역시 맞는 말이다.
벌써 3년째 아침저녁으로 늘 그 자리에 서있는 나무를 만나며 출퇴근을 한다.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그을릴 정도로 정신없이 일하다가 기분전환을 위해 가끔 문밖으로 나와 살구나무, 나무 위 전봇대에 앉은 참새와 까마귀들을 바라보곤 한다. 좋아하는 캠핑의자에 커피를 들고 앉아 참새, 제비, 까마귀,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낀다. 문득 나무에서 일어나고 있는 느리면서도 확실한 변화를 생각하면 나도 함께 이 거대한 우주의 순환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는 생명으로 살고 있구나 싶다.
나무도 날씨에 따라 그 해의 운세가 있는지 작년에는 꽃이 피었다가 냉해를 입고 열매를 많이 달지 못했다. 어떤 때는 너무 많은 열매가 열려 가지가 휘청 부러지기도 한다.
겨울 내내, 봄이 되어도 불안과 무기력에 쩔쩔매며 다녔다. 한 치 앞이 안 보이게 마음이 어두컴컴하면 실제로도 뭔가가 잘 안 보이나 보다. 도무지 오지 않을 봄처럼 느껴졌는데 어느 날 고개를 들어보니 살구나무에 꽃이 가득 피었다.
아! 살구나무야! 네가 거기에 계속 있었구나!
말없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가득 피우며 나에게 온몸으로 희망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아.
갑자기 와락 눈물이 솟구친다.
살구나무에 핀 꽃을 자각하며 비로소 올해 내 봄이 시작되었다. 살구가 익어가는 6월, 올해 살구는 유독 크고 향긋하다.
나무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도 든든하고 감사한 일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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