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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아파파 Jul 08. 2024

공장 안정화

떠나야 할 시간

이제 가야 할 시간이 왔다.

나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잘 돌아가는 공장. 이제 나의 품을 떠나 그들의 곁으로 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입사 3년 차 초보 시운전 엔지니어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에서 이제는 값진 경험을 쌓은 8년 차 대리 시운전 엔지니어로 성장한 나. 5년이라는 시간. 어떻게 생각하면 긴 시간이지만 되돌아보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것처럼 짧게  느껴진다.

혼자 프로젝트를 맡아 이리저리 여러 부서를 돌아다니며 궁금한 것에 대해 물어보고, 각종 도면과 자료들을 살펴보며 공부했던 시간들. 첫 1년은 어리바리한 나에게 적응의 시간이었다. 몇 백장의 도면을 살펴보고, 한 장 한 장 형광펜으로 색칠을 하고, 이전에 수행했던 프로젝트를 참조하여 시운전 작업에 대한 절차서를 작성했던 그 시간.

매니저가 선임되고 후배의 합류로 조금씩 달려가던 2년 차. 혼자가 아닌 팀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었던 활기찬 시간이었다. 더디게만 진행되었던 일들이 조금씩 속도가 붙었고, 후배와의 협업으로  일처리가 점점 더 빨라지던 시간. 프로젝트에 합류한 다른 부서사람들과의 관계도 친밀해지고, 발주처와의 만남도 진행되었던 시간. 한층 자신감이 붙어가던 시기.

현장에 발을 디디고 시운전엔지니어로서 현장의 일들을 준비하고 수행하던 시간. 수십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해결해 나가고 풀리지 않던 일을 발주처와 미팅을 통해 풀어나가던 시간. 3년 차는 나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한 시간이었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던 시간. 오로지 시간 안에 맡은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던 그 시간.

공장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공장이 갑자기 멈추고 멈췄던 공장은 다시 돌리며 나의 머릿속에 온통 공장 생각뿐이었던 시간. 내 자식같이 아픈 곳은 없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 돌아갈지, 아픈 곳을 어떻게 치료할지. 잠들기 직전까지, 꿈속에서도 공장의 모습을 지켜봤던 4년 차. 공장이 나였고 내가 공장이었다.

이제는 나의 품을 떠나야 하는 5년 차.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나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멋지게 돌아가는 공장. 어엿한 성인이 된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게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하얀 헷맷을 쓰고 밑창이 다 닳은 안전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지나가는 곳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공장이 폭발한 줄 알았던 스팀 브로잉(Steam blowing), 촉매 운반 중 촉매를 뒤집어써 하얀 눈사람으로 변했던 촉매로딩(Catalyst loading), 온 세상이 탄광으로 바뀌어 도저히 공장을 돌릴 수 없어 갑자기 멈추었던 그 사건(Emergeny Shutdown) 등 평생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나 생생하고 아찔했던 그 순간들.

운전실로 들어가 운전원 한 명 한 명 모두 악수를 하고 인사를 했다.

"컵쿤캅"

감사합니다. 그들이 있어 이 시간도 만들어졌다. 내가 요청하는 데로, 내가 알려주는 데로 잘 따라준 그들. 경험도 없었던 나를 믿고 끝까지 함께 해준 그들. 따스한 손길과 뜨거운 포옹이 나에게는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차에 몸을 싣고 정문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언제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이제는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아이들과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이곳은 나의 가슴속에 품어둔 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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