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보면 온갖 불행을 주제로 하루에도 수십 개씩 글이 쏟아집니다.
작고 기특한 불행부터 크고 기이한 불행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다른 이가 걸린 암보다 자기가 걸린 감기가 더 아픈 존재이기에
제 작은 불행 한 조각을 가지고 태산처럼 글을 쓴 건 아닌지 고민이 됐습니다.
한편으론 그때 느꼈던 제 감정을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구독자분들이 읽을 때를 위해 어느 정도 다시 수정을 해나갔습니다.
사실 제 주변 지인 중에 저희 엄마가 이렇게 아픈 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네에선 어느 정도 저희 집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감춰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엄마가 쓰러진 날,
아버지를 다독이며 밤새 병원을 찾아다녀주셨던 소방대원분들.
엄마의 회복을 내 가족처럼 걱정하며 염려해 준 성당분들.
엄마가 없는 빈자리를 느낄까 봐 음식을 하면 가져다주시던 이웃들.
생각지도 못한 배려와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이웃의 따뜻함이 남아있는 이곳에서 부모님은 여생을 보내실 계획입니다.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속풀이 하듯 썼던 제 글에
댓글도 달리고 구독자도 생긴 게 너무 신기하네요.
댓글에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몰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여러분의 바쁜 일상 속에 밝고 좋은 것만 누리셔도 부족한데 우중충한 제 글이 뭐라고 시간 내서 봐주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엄마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라는 브런치북을 집필하는 과정은
제게 일어난 일을 다시 글로 옮겨 적는 것뿐인데도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좋은 기억은 아니기에 애써 잊으려 흩어놨던 감정들을 다시 모으고,
글을 쓰는 작업을 통해 풀어내며 그때를 곱씹어보고 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발견한 이 문구는 저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프랭클 -
인생에서 때론 찾아보는 불행의 바람 속에서
엄마가 아파도 여전히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흔들리는 촛불과 같은 얕은 행복에 대해 피식 웃음이 샐 때면, 스스로가 이래도 괜찮은가? 되물을 때가 있습니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글이 되고 싶었는데 부족한 제 글 실력으로 인해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네요.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글은 여러분에게도 보내는 글입니다.
비록 우리가 만난 적은 없지만,
주신 이 위로가 여러분이 정말 힘들 때 다시 찾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평생에 노트 한 권을 다 써본 적이 없고, 일기장도 매일 써본 적이 없는데
여러분 덕분에 이렇게 결실을 맺어보네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 글쥐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