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Feb 20. 2024

해직둥이(@아난)

#13. 기억 속 최초의 장소

“이야. 해직둥이가 벌써 이렇게 컸나.”


아버지 친구들은 나를 ‘해직둥이’라 부르시곤 한다. 아버지가 해직교사가 되어 학교를 떠난 1989년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시대에 ‘교사도 노동자다!’를 외치다 야인이 된 상태에서 갓난쟁이인 나를 만났다. 기억나지도 않는 내 무의식의 영역 속에는 시위나 정치적 집회의 현장도 한 칸 자리 잡고 있다.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해직둥이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노동운동가의 이름 “박! 뚠! 보! “를 엄마 등에 업혀 함께 외쳤다고 한다. 아기의 성격이 형성된다는 시기에 나는 “투쟁!”을 외치던 현장에서 무의식을 쌓았다.


해직과 해직둥이의 동시다발적인 만남은 집에 생활고를 가져왔다. 늘어난 입까지 두 자식을 책임지기 위해 부모님은 매일매일을 고민하며 양말장수부터 사진관, 학원 강사까지 온갖 장사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돈이 없어 팍팍할지언정, 의식의 세계가 채 완성되기도 전부터 해직둥이는 좋은 사람들로부터 응원의 에너지를 받았다. 이 때는 나를 해직둥이라 불러주는 어른들이 우리 집의 안전망이었다. 부모님의 친구분들은 언니와 나의 이름으로 돈을 모아 건네거나, 받지 않겠다는 부모님께 무심하게 생활비를 투척하고 가셨다. 그들은 경제적 편안함, 사회적 지위를 다 내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회와 바라는 미래가 분명한 사람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 덕분에 우리 집은 버텼다.


이후 다양한 시간들이 덮어쓰기 되어 해직둥이였던 시절의 잔상이 사라졌을 때쯤, 무의식 속의 기억이 처음으로 깨어난 시기가 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가신 뒤 온 국민이 촛불로 들끓던 때다. 미군 장갑차에 처참하게 깔려 죽은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기 위해 처음으로 참여한 집회에서 해직둥이 자아가 깨어났다. 한낮에 우리나라에서 여중생들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게 황당하기 그지없는데, 한국 법정에 세워보지도 못하고 미군이 무죄로 마무리 짓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당시 14살이었던 나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았던 희생자들의 죽음에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한 현실에 충격을 받으며 첫 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소에는 정신없이 차들로 가득한 서면이었는데 한쪽 도로가 시위로 통제되어 차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중간쯤 걷고 있는데 어른들이 길을 터주며 어린 나와 언니를 앞으로 보내주었다. 나는 어느새 맨 앞 줄에서 긴 현수막을 손에 쥐고서 낯선 사람들과 걸었다. 처음에는 입에서 우물쭈물 구호를 삼키다가 어느 순간 박자가 맞아 함께 외치면 왠지 모를 시원함이 느껴졌다. 저녁이 되자 서로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종이컵 가운데를 뚫어 촛불을 넣고서 옆 사람에게 불을 옮겨 붙여주었다. 무대 앞 단상에서 울부짖는 어른부터 내 또래의 아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나왔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추모의 메시지를 던지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자고 외쳤다.


이전까지 한 가정과 이웃 안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로 존재했지만,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나로 알을 깨고 나온 듯했다. 무의식 저 너머에 있던 해직둥이의 마음속 불이 탁! 하고 켜졌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나서서 함께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낀 첫 경험이었다. 시위는 평화롭고 따뜻하고 재미있었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몰랐던 현실을 알았다. 그날 밤 TV 뉴스에는 대낮에 행진하던 언니와 내 모습이 나왔다. 같이 모이니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저 무리에서 발맞춰 걷는 내 모습이 신기하고 꽤나 마음에 들었다. 서면 촛불집회에서 사회적 자아로서 깨어난 내 최초의 기억은 따뜻하면서도 서릿한 사회에 대한 씁쓸함으로 가득했다.


집회의 에너지를 좋아하는 해직둥이는 자라면서 혼란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시위를 무작정 비난했다. 막상 대화를 해보면 데모하는 사람들이 왜 울면서 삭발을 하는지, 온몸에 불을 지르는지,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몇 날 며칠을 울부짖는지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디 사회에 반기를 들어 불편함을 만드냐며 데모라는 ‘현상’에만 집중하여 비난했다. 원색적인 이념 논리부터 ‘으유! 노조는 맨날 데모만 해’ 하면서 사람들은 시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티비에서 보이는 거칠고 자극적인 시위가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들에 비해, 해직둥이는 달랐다. 남몰래 마음속으로는 데모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다. 그들이 왜 저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세상이 다루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찾아 읽었다. 시위는 우리 사회의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려 ‘자! 사실 우리 사회가 이렇게나 문제가 많았답니다!’라고 약자들이 벼랑 끝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잊고있던 사회적 자아가 깨어난 그 날 이후 늘 불씨 하나를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가 불씨가 타오를 때면 세상으로 뛰어나갔다.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억울하게 떠난 이에 대한 추모식이 열리면 찾아가 광장에서 함께 목놓아 울었다.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투사가 된 부모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시나브로 노란색 열쇠고리를 만들곤 했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가 전국을 뒤덮을 때, 현실은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풍자가 넘쳐나는 촛불집회의 그 따뜻하고 유쾌한 에너지가 좋았다.


최초의 기억을 밑천 삼아 ‘훗날에 돌이켜 봤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이라는 마음을 새겼다. 행동하지 않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행동을 하더라도 사회는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움직여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필요하다. 그래서 여전히 누구든 효순이, 미선이가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수학여행 중 배가 가라앉을 수도 있고, 친구들과 만나려다 인파에 내몰려 바스러지거나, 비가 퍼붓는 날 지하차도에서 알아서 살아 나와야 하든. 어디서든 희생자들의 비극이 내 일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다가 연대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면 마음에 불씨가 화르륵 타오른다. ‘와 아직도 안 바뀌네.’ 허무하면서도 이것밖에 못해서, 이거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선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명을 위해 당신의 무언가를 내려놓고 같이 움직여 본 적이 있는가? 마음 한 켠에 적어도 이 가치만큼은 잘 지켜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해직둥이는 최초의 기억을 밑천 삼아 오늘도 마음속 촛불을 켜둔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땡비] #13. 기억 속 최초의 장소

 - 못골 글 보러가기 : 첫 기억 https://brunch.co.kr/@ddbee/61

 - 흔희의 글 보러가기 : 볕에서 그늘을 바라본다는 것 https://brunch.co.kr/@ddbee/62

 - 아난의 글 보러가기 : 해직둥이 https://brunch.co.kr/@ddbee/58



못골, 흔희, 아난의 글을 한 달에 2번 뉴스레터 땡비로 받아보는 거 어때요?

 - 땡비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35860

 - 지난 글 보러가기 : https://ddbee.stibee.com/

매거진의 이전글 걸어둔 빗장을 열어본다면(@흔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