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Feb 18. 2024

걸어둔 빗장을 열어본다면(@흔희)

#12.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에 위치한 와우산 중턱에는 ‘달맞이길’이 있다. 중동과 송정동 사이를 잇는 고갯길인데 길을 따라서 벚꽃나무가 터널을 만들어 봄이 되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유명하다. 달맞이길 언덕의 중턱에는 원래 해운대 AID 주공아파트가 있었다. 십 층 정도 높이의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건물이 나이가 든 만큼 아파트 단지 내의 나무들도 함께 나이가 들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낡음으로 드러내는 건물과는 달리 나무들은 울창함으로 그 흔적을 여유 있게 드러내곤 했다. 특히 봄이 되면 벚꽃이 만개하여 아파트 주변에는 분홍빛 비가 내렸고, 동네 주민들은 외지인들로 북적거리는 달맞이길의 명소를 피해 주공아파트에서 벚꽃의 낭만을 즐기곤 했다. 2012년, 45동 2천 60가구가 모여 살았던 주공아파트가 완전히 철거되었고 그 터는 고가의 아파트가 다시 자리를 메웠다. 아파트와 함께 나무들도 잘려나갔다. 동네 주민들에게 개방되었던 장소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서자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고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 되었다.


비슷한 일이 작년 여름에도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대대적으로 시작된 공사가 문제였다.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고 지하주차장을 보수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출입문이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통로 쪽의 모든 문을 자동화하여 걸어 잠갔다. 입주민들은 핸드폰에 연동 어플을 설치하거나 카드키로 자신이 문 안의 사람임을 증명해야 했다. 다른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같이 놀 수가 없다고 투덜대는 아이의 모습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였다. 그중에서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동노아’가 없어져서 편하다는 의견이었다. 한 번에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던 나는 그에게  ‘동노아’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는 ‘동네에서 남아 노는 아이’라고 답을 주었다.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지금과 나의 유년시절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길’이 가지는 의미였다. 마주 보고 서 있는 주택들 사이에 나 있던 길은 나에게 마당이자 운동장이었다. 길 위에서 나는 친구들과 잡기놀이를 했고 전봇대에 고무줄을 묶고 고무줄 뛰기를 했다. 길을 따라 친구들과 다른 동네까지 넘어가서 놀다 오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3명에서 시작된 놀이는 어느덧 6~7명으로 몸짓을 불리기도 했다. 또 우리 집 앞에는 다른 집 차의 주차를 막기 위해 세워둔 직육면체 모양의 입간판이 있었다. 여름밤이 되면 엄마는 수박을 잘라 입간판에 놓아두었고 동생과 나는 그 위에 앉아 수박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엄마는 이웃들이 지나가면 수박을 권하기도 했고 길을 가던 옆집 아줌마는 걸음을 멈추고 수박 먹는 것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요즘의 길은 그때와 다르다. 서로 다른 아파트 사이에 길은 있지만 그 길에서 삶이 겹쳐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담장을 세우고 출입문을 걸어 잠그며 칸을 지른다. 토끼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크는 아이의 세계는 좁다. 아파트 내의 놀이터에서도, 상가 안의 피아노 학원에서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낸다. 아파트 사이로 난 길에는 차가 다닐 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행인1, 행인2로서 스쳐 지나간다. 어린 시절 나는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던 초등학교 등굣길을 혼자 걸어 다녔다.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길 주변의 상점 주인이나 길가를 지나가는 어른들이 대개 이웃이었기에 그들이 어린이들의 안전지대가 되어주었다. 요즘 나는 아이에게 혹시 길을 가다가 당황스러운 상황이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라고 일러둔다. 동네에, 길가에 믿을만한 아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가 지어지고 닫힌 공간에서 사람들의 세계는 단절되고 있다. 점점 이웃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간다. 내리는 벚꽃을 눈에 담다가 마주친 시선에 이웃과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던 곳이 사라졌다. 집 앞의 마당이자 운동장으로 용도가 다양했던 어린 시절의 길은 없어지고 길 위에서 마주치던 어른들도, 아이들도 이제는 그저 행인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자신과 남을 구별 짓는 데 익숙해져 간다. 남들에게 경계를 세우는 만큼 세상은 칸막이로 분절되고 좁아진다. 경계를 세우는 기준은 비단 아파트 이름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기준은 이념이 될 수도 있고 성별일 수도 있으며 취향이나 나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수한 빗장을 삶에서 걸어 잠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삶의 가짓수는 많지 않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 하나의 개인은 각자의 삶이라는 서사를 지니고 있으며 타인의 서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때문에 사람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열린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누군가와의 접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삶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세상을 넓혀간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아직 남은 날들이 많고 우리는 보고 겪어야 할 것들이 많다. 나도 모르게 걸어둔 어떤 곳의 빗장을 이제는 한 번 열어보는 게 어떨까? 그 빗장이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래서 열기 쉽진 않겠지만. 일단은 열어보려는 시도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진 않길 바란다. 당신도. 나도.



[땡비] #12.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망가져 사라지는 금강식물원 https://brunch.co.kr/@ddbee/56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걸어둔 빗장을 열어본다면 https://brunch.co.kr/@ddbee/60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자기만의 공간 https://brunch.co.kr/@ddbee/59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못골, 흔희, 아난의 글을 한 달에 2번 뉴스레터 땡비로 받아보는 거 어때요?

 - 땡비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35860

 - 지난 글 보러가기 : https://ddbee.stibee.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