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
내 사주에는 늘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역마살’이 등장한다. 과거에 역마살(驛馬煞)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객사하는 나쁜 기운으로 해석되었다. 역마는 조선시대에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각 지역의 역에 준비해 둔 말을 의미한다.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해야 하여 이 역, 저 역을 분주하게 돌아다닌 말이라는 의미의 ‘역마’와 사람을 해치는 독한 기운의 '살'이 더해진 말이다.
타고난 기운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 서울, 독일 등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20대 때 5개의 집을 거쳤다. 하루하루 바삐 살다가 집을 옮길 때가 되면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했다. 집이라 부르기에 애매한 하숙방부터 시작하여 옮길 때마다 조금씩 집의 형태를 갖추어 나아갔다.
낯선 서울에 처음 와서는 친구와 둘이 쓰는 하숙방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러다 혼자 쓰는 하숙방으로 공간이 진화했다. 독일로 훌쩍 떠나 들어간 교환학생 기숙사에서는 공동으로 쓰는 주방과 욕실이라 온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과 면을 텄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누군가의 집이 아닌 처음으로 주인이 ‘나’인 제대로 독립된 자취집에 정착했다. 가장 오래 지냈던 이 집에서 나는 2번의 인턴과 3 곳의 직장을 거치며 정신없이 살았다. 아쉽게도 집의 계약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집주인이 바뀌어 어쩔 수 없이 유목민이 되어 다른 집으로 옮겨갔다.
지하철 2호선, 6호선, 9호선까지 온갖 동네를 다 돌아다니며 찾은 다음 집은 드디어 온전한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내가 처음으로 입주한 집이라 모든 것이 깨끗했다. 새하얀 가구들로 채워진 나만의 주방, 화장실도 모두 들어와 있어 좁지만 아늑했다. 그러나 집 이사 때문에 연차를 처음으로 쓰고 돌아간 날 스타트업에서 해고되면서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 때마침 지원해 두었던 부산의 한 회사에 취직이 되어 급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여러 집을 거치면서 나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경계를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 사이를 매일 오갔다. 혼자 있기 외로워서 잠자는 시간 빼고는 친구들과 보내고, 잠자는 시간까지도 같이 보낼 때가 있었다. 건너편 친구집에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자취방에 잠자러 돌아갈 때면 머리 위로 큰 지붕을 상상했다. '지금 걷는 이 횡단보도를 가로지를 만큼 큰 지붕 아래 이어진 집에서 우리는 그냥 같이 사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친구들과 붙어 지냈다.
나의 20대가 묻혀있는 여러 집들은 이제 사라졌지만 가끔씩 머리에서 그 공간들이 탁하고 떠오른다. 역마살 많은 친구들 사이에 껴있어서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 독립된 공간에서 살아나가는 경험이 흔치 않음을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과 살다가 결혼 등 자신이 선택한 가족과의 또 다른 동거로 이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자기 공간’이 사람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나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는 순간을 일생에 한 번은 경험해 보아야 한다. 좁아터진 방일지언정 적막감이 맴도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유로워졌다. 온전히 내 의지대로 있을 수 있고 누구의 말에도 휩쓸리지 않을 때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뒤엉켜있는 여러 감정들을 참지 않고 모두 토해냈고 누구의 무엇도 아닌 아무 역할 없이 그냥 나로서 존재했다.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가족이든 누구든 의식할 수밖에 없구나’를 완전한 혼자일 때 깨달았다. 밖에서 정신없이 사람들과 에너지를 주고받다가 집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와 집이다!’하는 그 안도감이 참 좋았다. 혼자 사는 집의 고요함이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진공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고요함이 왁자지껄한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되기도 했다. 기대나 역할이 없는 방에서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사람의 품을 그리워했다. 하루종일 혼자 있다 보면 더디게 가는 나만의 시간대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며 빠르게 가는 그 시간대로 넘어가려고 늘 약속을 잡아두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달래다가, 집에 왔을 때 있고 싶은 대로 있을 수 있는 자유 사이에서 시소를 타며 살아갔다.
나는 역마살 덕에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믿기때문에 내게는 좋고 반가운 기운이다. 경주마처럼 바삐 살던 시절의 여러 동네들을 가도 그 집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 다른 누군가의 공간이 되었기에 이제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가끔씩 삶이 버겁고 너무 애쓴다는 느낌이 들 때면 실제로 가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그때 그 집들로 돌아가본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사람들의 품과 나만의 공간 사이에서 어디쯤에 내가 있어야 할까를 지금도 고민한다. 사람 사이에 있으면서도, 혼자 있고 싶기도 한 이 여전한 변덕스러움을 어찌할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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