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라져서 그리운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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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늘 어울려 지내던 친구 셋이 있었다. 김재익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주변에 여자들과 잘 사귀어 우리들에게 자랑을 했다. 그의 옆에는 늘 여성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남자를 보아도 시각은 서로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반면에 경태는 일만 죽자고 할 뿐 여성은 사귀어 본 적 조차 없는 숙맥이었다. 그 둘과 나 그리고 경태집에 세 들어 자취하는 영순이 이렇게 비슷한 20대 중반 연령대의 4명이 자주 어울렸다. 경태는 건축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재익이는 덤퍼 트럭 운전을 했다. 대개 만나는 횟수가 경태, 영순이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어울리고 경태집 근처에 사는 재익이는 가끔 자리를 함께 했다. 통금에 걸리면 경태 방에서 함께 자고 새벽 일찍 수정동 집으로 왔다.
이성과 교제해 본 적 없이 늘 혼자서 일에만 빠져 있는 친구 경태가 안쓰러웠다. 영순에게 좋은 아가씨가 있으면 경태에게 소개하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갔다.
부곡동에 갔더니 영순이 예쁜 후배가 있어 소개를 하겠다고 한다. 그 말에 경태도 나도 들떴다. 소개팅을 하는 날이 다가오자 경태가 묻는다. “야! 옷은 어떤 것을 입고 갈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되노?”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형에게 빌려서라도 양복 입고 가라!”라고 하니 경태는 쑥스러워하며 “머!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그냥 입던 점퍼 입고 갈끼다.” 라는 말에 그의 겸연쩍고 수줍어하는 성격이 느껴진다. "깨끗한 옷을 멋있게 입고 가자"라고 했다.
소개팅 날이 되어서 영순이, 나, 경태 그리고 상대 아가씨 이렇게 4명이 다방에서 만났다. 머리 장식에 살짝 망사를 늘어뜨리고 소매에도 망사가 있는, 한눈에 봐도 온 성의를 다해 외모를 가꾼 단정한 느낌을 받았다. 여성은 큰 키는 아니지만 이쁜 외모였다. 좋은 사람을 소개해준 영순이의 성의가 고마웠다. 영순이와 나는 잠시 분위기만 잡다가 둘을 남겨두고 나왔다.
며칠 뒤에 만나 싱글벙글하는 경태에게 진정으로 두 사람의 사귐을 축하해 주었다. 영순이에게도 고맙다며 크게 인사를 했다. 이후로 서로 바쁜 사회생활 속에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경태는 처음 이성을 사귀니 얼마나 좋을까? 그의 표정에서 그런 기쁨이 뿜어 나왔다. 사랑하면 만나고 베풀고 싶어 진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다며 좋아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처음 만나 서로 미친 듯 좋아하니 우리도 보기가 좋았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재익, 경태, 나 그리고 영순이와 정옥이 5명이 온천장 금강식물원으로 놀러 갔다. 그때 식물원은 관리를 아주 잘하여 겨울에 유별스레 더 추운 날에 구경을 가면 완전 별천지이다. 따뜻한 온실에서 시간적 여유를 가지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우리 일행은 함께 촬영을 하고 경태의 커플 촬영도 해주었다. 자랑하듯 자신이 사귀는 여성을 위하는 경태를 보며 우리들은 즐거웠다.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여 나누어 주었다.
지극 정성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경태의 마음에 그녀인들 그냥 지나고 싶었을까? 무엇이든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베풀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 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은 옷을 볼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8개월 정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경태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인근에 그녀는 오빠와 둘이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큰방 옆방인 작은 방은 경태방이고 그 옆에 영순의 방이 있었다. 어느 날 경태 집에 놀려 와서 밤이 한참 되었는데도 정옥이 가지 않았다. 얼마나 긴장했을까? 친구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정옥이 이게 무슨 소리냐며 웃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정옥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경태보다 4살 정도 나이 많은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정옥이 오빠라고 했다. “이야기 좀 하자!”며 가까운 다방으로 가서 친구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객지에 와서 고생하며 생활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고서 여동생을 보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처녀, 총각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경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안 보면 못 견딜 정도로 좋아하니 그냥 내가 책임지겠다고, 함께 살겠다고 대답하면 간단하게 끝날 순간을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숙맥인 친구를 보고 정옥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로 정옥을 볼 수가 없었다.
정옥을 자신의 분신처럼 좋아했던 친구는 사랑했던 만큼 크게 충격을 받았다. 상심하여 2달을 폐인처럼 누워있었다. “헤어지고 나서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회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며 슬프게 물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스쳐가는 홍역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아픔 그런 고통을 모두 겪으며 우리는 늙어 가는 것이 아닐까?
지내 놓고 보면 고통도 환희도 모두 자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귀한 역사이다.
금강식물원은 부산 mbc 촬영대회가 1970년대 처음 개최된 장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1979년 나도 처음 사귀었던 아가씨와 식물원에 갔다. 조영남의 제비 노래를 부르며 어린이처럼 율동하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그녀와 헤어진 뒤로 제비 노래가 들리면 아련한 그 옛날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본다.
우리들의 젊은 날 사랑은 속절없이 떨어져 사라지는 눈꽃처럼, 어질한 봄 아지랑이 속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스쳐 지나가 버렸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것은 없나 보다! 잘 가꾼 많은 화초와 나무로 싱싱함을 보여주던 식물원도 이제는 쇠락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다. 방문객이 없으니 그냥 망가져 가고 있다.
사랑하던 아가씨를 보내고 그렇게 아파하던 경태도 영천처녀와 선을 보더니 1달 만에 결혼을 했다. 그는 1990년 중동 리비아 수로 건설공사(1984~1995)를 다녀온 이후 어느 날 군대 복무 중인 아들에게 엄마와 이혼했다는 소식을 편지로 보냈다.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그 친구에게 때때로 가서 편하게 한 잔 하고, 서로 안부를 확인하며 옛날이야기를 한다. 간혹 “야! 정옥이 어떻게 살까?”하고 물어보면 경태는 말없이 그냥 싱긋이 웃는다. 얼마나 아련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못 이룬 사랑이 오히려 더 애틋한 추억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1월, 신호등 앞에 서면 살을 에이는 듯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불고 있지만 이런 추위도 곧 사그라들 것이다. 날씨가 조금 포근해지면 황폐해진 식물원에 한번 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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