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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Feb 02. 2024

고관입구 3층집(@못골)

#11. 부산에서 기억하고 싶은 장소

결혼할 때는 참 암담한 시기였다. 무엇을 시도해도 취업이 되지 않으니. 장애물로 꽉 막힌 듯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로 2학년 2학기부터 야간학교 강사로 일했다. 생활비가 급했다. 졸업하고 야학을 그만두고 결혼 전 아내의 도움으로 취업 시험을 준비하려 남산동에 있는 ‘문창 고시원’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나처럼 나이 많은 절박한 사람들이 고시를 목적으로 쉼 없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금방 들어온 나에게 같은 방 고시생이 물었다. 

“형씨는 무슨 공부를 해요?” 

“나는 오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서 6개월 정도 예상을 하고 6급 공무원 공부를 한다.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연령제한이 없는 순위 고사 준비도 함께하고 있다”라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어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그들은 그냥 계속 고시생으로 낭인이 되어 공부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무신을 신은 채 수염도 깎지 않고 시험장에 갔다. 꼭 합격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절박하면 통한다는데 절박하기 때문에 오히려 되지 않기도 하나보다. 또 낙방이었다.      


나보다도 아내는 동생이 여럿 있어 결혼이 급했다. 어머니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결혼을 해보는 것도 난국을 헤쳐가는 방법이 되니 결혼을 하는 것은 어떻겠냐?”하며 물었다. 어머니와 의논하여 우선 결혼을 하기로 했다. ‘결혼하면 또 다른 변화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함께 하였다. 그만둔 야학에서 “다시 일을 해달라”며 연락이 왔다. 다른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비가 필요해 다시 출근하였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신랑집에 딸을 데려다주고 가시는 장인어른을 보면서 참 면목이 없었다. 야학에 나가서 겨우 알바처럼 일하는 반실업 상태에 있는 사위를 보고 얼마나 낙심했을까? 처음 우리 집에 와서 딸을 두고 돌아가는 그날 장인어른과 함께 걸었던 수정동 산복도로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아내와 사이가 나빠지면 늘 그때를 기억해 본다.


결혼 후에도 여기저기 취업원서를 내었지만 계속 실패였다. 막연히 시험만 기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던 야학을 그만두고 조방 앞 성모병원 근처 화랑 염직 회사 현장 노동자로 취업하여 맞교대로 근무했다. 포충기(원단 폭을 늘리는 기계)에 원단의 양쪽 가장자리를 기계가 물어서 당기면 원단에 수증기로 열을 가하여 펴고 말아서 저장하는 작업이었다. 열기로 늘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었다. 12시간 일을 하고 12시간 쉬는 근로제였는데 자고, 먹고, 일하고 그 이외는 어떤 여유도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로부터 격리된 생활이 이어졌다.     


점심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작업반장이 아미동에서 출퇴근하던 직원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 직원이 월급을 받은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퇴근하여 조방 앞에서 아미동 집까지 걸어서 갔다고 한다. 군데군데 있는 포장마차나 잔술집에 들러 한두 잔씩 소주 대포를 계속 마시며 걸어서 자기 집까지 갔다. 그는 눈길 속에 집에 거의 이르러 쓰러져 아침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저임금으로 생활이 되지 않으니 가난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의 굴레로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작정하고 월급으로 술을 마시며 걸어서 자기 집까지 걸어갔을 그의 좌절을 생각하면 얼마나 암담한가?

야간작업 중 자정이면 야식으로 제공되는 국수를 노동자들이 욕심내어 지나치게 많이 먹고 여기저기 토해 놓는 경우도 무수했다. 원단 운반 수레 속에 처박혀 잠자는 노동자들을 보며 ‘세상 사는 것이 모두 참 힘들구나’하고 생각하였다.      


신문광고란에 강사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학원에서 강의하게 되어 염직 회사는 그만두었다. 수업한 시간 수에 곱하여 수당을 주니 염직 회사에 근무할 때보다는 수입이 좋았다. 

신혼집은 동대신동 적산가옥(敵産家屋:적들의 재산. 왜놈들이 살던 한옥)이었다. 부엌과 방이 붙어있고 방의 창문을 넘어서 부엌으로 가야 하는 불편한 구조였다. 그렇지 않으면 방을 나가서 한참을 돌아 부엌으로 가야 했다.      


신혼집에서 두 번째로 이사 간 곳이 고관 입구이다. 이 고관 입구는 윤흥신 장군 동상이 있는 대로변 옆 3층 집이다. 나는 이 집에서 내 인생의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1층은 보장구(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는 기구)를 만드는 공장이고 2층은 주인집이 사용하고 3층을 우리에게 임대해 주었다. 이사 간 첫날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려니 잠긴 3층 출입구를 열지 못해 끙끙거리다가 주인집 문을 두드려 좀 열어 달라고 했다. 자고 있던 집주인은 기독교인이었는데 술 마시는 자체도 싫어했지만 밤늦게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응답을 해주며 그날 이후로 술 처마시는 무례한 인간으로 나를 취급해 주었다.      


이 집에서 30분 정도를 걸어가면 어머니에게 갈 수 있었다.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오니 나는 좋았다. 어머니는 무슨 별식을 만들면 갖고 와서 먹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없는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냐? 못 낳는 것이냐?”며 애타하셨다. 학원 강사로 일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보너스로 받은 돈 한번 써보면 좋겠다”는 말로 은근히 정규직 교사가 되길 바랐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오니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 성분도 병원에서 진찰을 받으니 “가벼운 위궤양이고 예사로 있는 경우이니 조금 치료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젊을 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위장이 좋지 않아 노신(원래 명칭 뇌선. 하얀색의 해열진통제)을 자주 드셨다. 그렇게 살아오셨으니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2달이 지나가는데도 어머니의 복통은 계속되었다. 그제야 ‘아차! 이것 무슨 일이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산대학병원에 가서 긴 줄을 선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뒤에 이어 섰다. 속으로 ‘아무런 일도 없겠지! 그냥 약만 조금 먹으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내게 빙의하여 나 자신에게 말을 했다. ‘그냥 예사로운 병일 거야!’ 그래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순서가 되어 손으로 진찰해 본 나이 많은 의사가 “아무래도 간암인 것 같다”라고 하며 정밀 검사를 받아 보자고 한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검사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며 근처 여관으로 가서 쉬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검사 결과는 간암이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그 시절에는 간암은 사망진단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어머니가 아침에 드실 죽을 사기 위해 토성동 시장으로 걸어가면서 깨어나면 '아무 일도 아닌 차라리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원을 몇 번이고 하였다.      


집에서 부산대학병원까지 멀고 병시중하기도 힘들어 일단 수정동 집으로 퇴원하였다. 보건소에 근무하는 학원의 제자에게 부탁하여 진통제를 소개받고 사서 아내가 근육주사 놓는 방법을 배워 집에서 주사를 놓았다.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복수가 차고 힘들어 견디지 못할 상태가 되었다. 다시 고관 입구 집 근처의 침례병원으로 입원하였다. 

계속해서 복수는 차오르고 어찌할 수 없는 병으로 고통스러워하시는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는 하루하루가 쓰라리게 괴로웠다. 치유 불가능한 병은 절망감을 주어 곁에 있는 가족도 병들게 한다.


학원에서 수업하고 있는데 총무 아가씨가 급히 뛰어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라고 알리며 그녀도 당황하여 울었다. 급하게 병원으로 가자 아내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참지 못할 고통 속에 시간을 견디시더니.......


한 사람의 인생, 한 하늘이 무너져 버렸다. 한 번도 만족스레 꽃피지도 못하고 늘 가난과 걱정 속에 평생을 허덕거리며 살다가 쓸쓸히 인생을 마감해 버렸다. 운구차가 석계로 가는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마지막 길마저 아들을 생각해 주시는 어머니 마음 같아 서양 미루나무 뒤로 길 따라 흐드러진 코스모스를 보며 통곡했다.      


1985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났다. 그 해 처음 실시하는 사립학교 임용고사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일이 되어 아내가 어서 시험 치러 가라고 깨운다. 공립임용고사를 빠지지 않고 응시했지만 계속 낙방이었다. 이불속으로 도로 머리를 처박아 넣으니 억지로 깨워 다녀오라며 어깨를 밀었다. 옷을 챙겨 입고 가야고등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응시생들의 뒤에 붙어 섰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여자 응시생끼리 나누고 있었다. 질리는 느낌이었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을까?’ 하는 나름의 짐작을 했다.      

온갖 기억을 짜내어 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시험 결과는 잊고 학원 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1986년도 1월 아침에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오라고 하였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임용시험에 합격한 것이구나!’ 하는 직감이 느껴져 학원에 출근하며 아내에게 “가야고등학교에 가서 확인해 봐요”라고 했다. 학원으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아내가 흥분된 목소리로 “시험에 합격했다고 담당 직원이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라고 한다.      


갑자기 “내 죽으면 네가 잘 풀릴 것이다”라고 하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 어머니의 염원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이후로 꽉 밀려있던 인생의 한 부분이 물꼬가 트이니 성큼성큼 큰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학교로 임용되고 해직, 복직을 거쳐 2015년도 퇴직을 하였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려야만 기회도 잡을 수 있나보다. 고관입구 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학교에 임용되고, 어머니가 그렇게 기다리시던  소중한 첫 아이를 낳았다. 인생의 한 굽이를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이 집에서 내 인생에 가장 의미 있고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휘몰아치며 지나갔다.


고관 입구 그 집에 작년 11월에 가보았다. 장애인 보장구를 만들던 1층은 음식점으로 바뀌어져 있으나 2층과 3층은 옛날 그대로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흰머리가 많이 나 있었지만, 얼굴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인사를 하니 모르는 눈치이다. "84년쯤 이 집 3층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며 표정을 읽으니 치매에 걸린 듯 멍한 모습이다. 한참을 옛날 이야기를 하자 어렴풋이 기억난다면서 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인생이 참 허망하다.





[#11. 부산에서 기억하고 싶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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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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