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Feb 02. 2024

오래도록 기억할 푸른 뱀의 포구(@아난)

#11. 부산에서 기억하고 싶은 공간

갑갑할 때는 눈을 감고 ‘푸른 뱀의 포구’를 떠올린다. 이 포구의 가장 큰 매력은 포구로 넘어가는 언덕길에 있다. 양 옆으로 높이 솟은 아파트들을 끼고 오르막길을 걷는다.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고개 지점에서 푸른 뱀의 포구, 청사포가 시작된다. 갑자기 새파란 바다와 나지막한 어촌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아파트 숲에 있었는데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그 순간의 상쾌함이 좋다. 내리막길 끝에 있는 바다를 향해 달려가면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버릴 것 같은 풍경이 펼쳐져 몇 번을 봐도 좋다. 내려가는 골목에는 시골에서 장작 피울 때 나는 나무 타는 냄새가 마을을 가득 에워싼다. 낮은 돌담이 이어진 동네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빨래 더미와 미역줄기가 널브러져 있다. 길 끝에는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고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사이로 윤슬이 부서진다.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고 물가에 고깃배들이 줄줄이 넝실거린다.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어촌의 비릿한 공기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만 울리는 그 조용함이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긴장감을 녹여준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이렇게나 다른 세계가 숨어있다니 그곳에서 나는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내고 온다.      


푸른 뱀의 포구는 애틋한 이야기를 품고 있어 더 특별하다. 어린 시절 방학 숙제로 나는 청사포를 주제로 한 동네 신문을 만들었다. 나는 ‘청사포는 왜 청사포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집 뒤를 향했다. 포구의 오른쪽으로 쭉 걷다 보면 구불구불 큰 소나무가 감싸고 있는 사당이 나온다. 어린 나는 소나무가 보호하고 있는 듯한 사당에 신비로움과 호기심을 느끼며 다가갔다. 사당의 표지판에는 청사포를 둘러싼 전설 하나가 적혀있다. 이 마을에는 사이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어부였던 남편이 궂은 날씨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를 알리 없던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며 밥도 먹지 않고 소나무를 심고서 그 아래 바위에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이에 감동한 용왕이 푸른 뱀을 보내어 아내를 용궁으로 데려와 남편과 만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은 몸이 되어 둘은 함께할 수 없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아내의 소나무와 바위를 기리며 마을의 이름이 청사포가 되었다. 절로 신비로워지는 이야기에 청사포를 떠올리면 푸른 뱀이 물살을 가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모습이 상상된다. 이 푸른 뱀의 포구가 간직한 전설처럼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애틋하고 아련한 느낌의 청사포가 좋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조용한 어촌, 푸른 뱀의 포구는 사라졌다. 어느새 슬쩍 청사포(靑蛇浦)의 이름이 푸른 뱀이 아닌 ‘맑은 모래의 포구(淸沙浦)’로 바뀌었다. 마을 이름에 ‘뱀’이 들어가는 것이 부정적이다는 의견 때문이라고 한다. 모래라고는 없는 몽돌 해변인 청사포에 깨끗한 모래의 포구라는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이 붙었다. 있는 그대로의 청사포는 존중받지 못하고 깎이고 재단당하며 관광객 입맛에 길들여졌다. 청사포에는 블루라인 파크, 스카이 캡슐이라 불리는 관광객을 위한 열차가 마을 중심에 자리 잡았다. 멀리서 봐도 눈에 걸리는 것 없이 하늘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던 푸른 뱀의 포구는 사라졌다. 대신 거대 자본이 투자한 대형 카페가 즐비하고, 건설사의 해변열차가 길게 놓여 포구의 단아한 신비로움이 증발되었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게 좋지 않느냐고 하지만 배 불리는 이들은 건설사와 자본가들 뿐이다.


10대에서 30대를 거쳐오면서 청사포는 늘 내가 기억하고 싶은 비움의 공간이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집 뒤 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가 산책을 한다. 등대 앞 조용한 둔턱에 앉아 고민과 걱정을 털어낸다. 청사포를 걸으면서 배부름이든 걱정이든 뭐든 비워낸다. 그렇게 청사포에서 한껏 바닷바람을 맞고 뒤돌아서면 마을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늘어서 있다. 그 산 위로 고층 아파트들이 툭툭 밉게 튀어나와 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며 오르막길을 이제 오르고 또 올라간다. 길 중간에는 어릴 적부터 마음속 이정표이자 쉼터였던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다. 물놀이 뒤 오르막길에 지칠 때 큰 나무 그늘 아래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에 등을 대고 반대편 바다를 보며 쉬어가던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는 베어지고 의미 없는 새 모양의 바람개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리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너무 빠르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애버린다.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씁쓸함이 온 마음에 돈다. 청사포 고개 너머부터 개발이라는 이름의 병이 스멀스멀 들어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느새 깜깜해진 언덕길을 넘으면 양 옆 위아래로 무질서하게 차들이 내려오는 길 한 복판에 서게 된다. 차가 오지 않는지 고개를 바삐 돌려 확인하며 다시 도시의 세계로 넘어온다. 한적한 시골에서 번잡한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청사포를 원래의 이름 그대로 '푸른 뱀의 포구'라고 기억하고 싶다. 지금의 청사포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덕지덕지 걸친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해 본 적 없이 타인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채워졌다. 세상이 원하는 것으로만 칠해지고 있는 청사포에 계속해서 외치고 싶다. 네 원래 이름은 푸른 뱀의 포구였다고. 소박하고 애틋한 푸른 뱀의 포구였던 걸 마지막까지 내가 꼭 기억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11. 부산에서 기억하고 싶은 장소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고관 입구 3층집 https://brunch.co.kr/@ddbee/54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대티고개의 내력벽 https://brunch.co.kr/@ddbee/52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오래도록 기억할 푸른 뱀의 포구 https://brunch.co.kr/@ddbee/51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못골, 흔희, 아난의 글을 2주마다 뉴스레터 땡비로 받아보는 거 어때요?

 - 땡비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35860

 - 지난 글 보러가기 : https://ddbee.stibee.com/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12월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