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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Jan 20. 2024

나는 12월이 좋다.

#10.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



지금은 12월. 꽃도, 잎도 모두 떨어뜨리고 나무는 숲에서 흑백의 단순한 그림으로 흔들린다. 12월이 되면 본격적인 겨울이다.      


전철을 타고 42번째의 12월 모임에 가고 있는 중이다. 나이가 나와 비슷한 세 명의 할배들이 건너편 경로석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들린다. “야! 옛날에는 동창회 날이 다가오면 은근히 기다려졌는데 요즘은 그런 느낌이 없어! 만나고 싶은 좋은 친구들은 모두 나가고 안 봐도 좋은 친구들이 자리 차지를 하고 있으니 더 가기 싫어! 동창회 날이 와도 무덤덤해!” 그런 대화를 들으며 영화 'the others'의 생각이 났다. 당신들이 귀신인 줄 알았는데 내가 귀신이라는 반전처럼.


“좋은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나가도 좋을 사람만 남아 자리 지킴을 하는 것일지도”라는 말에 흠칫 나를 대입시켜 본다. 나도 나가도 좋을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반성을 한다. 1981년 1월 17일 모임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고 또 탈퇴하였다. 42년이니 42번째의 12월을 보내고 지금은 사진 모임에 일곱 사람만 남아있다. 1월부터는 발전적 해체를 위해 모이는 방법을 바꾸어 참석자에게만 회비를 걷고 적립금 없이 편하게 모임을 하려고 한다. 모임에 누구든 십자가를 지는 열정적인 사람이 2명만 있으면 그 모임은 꾸려져 나간다. 이제 모두 지치기도 한 모양이다. 그냥 회비만 내고 참석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한 회원들만으로 구성이 되면 이미 유통기한이 다 된 것이다. 우리의 모임도 쉼 없는 회전 후 이제 쉴 준비를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결산을 하고 새 계획을 짜고 비록 무너져 버릴 계획이라도 새로 구상해 보는 12월이다. 한 해가 다 가고 이제 새 달을 맞이하는 변화의 달이다. 


12월 겨울이 좋다. 늦가을의 느낌이 남아있는 11월이 지나면 12월이 되어 비로소 완연한 겨울이다. 한 해도 다 가는 12월 마지막이라는 그 해의 끝인 시점도 나는 좋다. 끝은 마무리이고, 쓸쓸하고, ‘더~’가 없어 깨끗하다. 2호선을 타고 장산역에 내리면 장내 스피커로 울려 나오는 “이 열차의 마지막 역 장산역입니다. 장산역은 마지막 역입니다”라는 말이 좋다.      


12월은 계절이 한 해와 맞물려 지나가고 찾아온다. 2월이 되면 입의 양쪽 가장자리에 염증이 생기면서 봄맞이가 시작된다. 어릴 때는 입이 커지려고 하는 것이라지만 실제로는 비타민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덩달아 표시 날 정도로 얼굴이 새카맣게 타면서 검어진다. 2월은 신체적으로 특이한 속에 맞이한다. 어머니는 내게 늘 ‘봄 탄다’라고 한다. 2월이 다 갈 때쯤이면 산수유꽃이 노랗게 물들고, 매화가 피고 새 봄이 왁자지껄 몰려온다. 나는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로 들어가는 소란스러운 계절이 싫다. 시끄럽고 분잡스럽고 몸마저 피곤해진다. 그래서 2월이 가면 겨울이 모두 가고 그제야 실제로 한 해가 가버린 섭섭함을 느낀다. 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지면 한 해가 간다고 하지만 나는 2월이 지면 한 해가 가버린다.


동료가 나에게 좋아하는 계절을 물어서 ‘겨울’이라고 하였더니 “가난하여 생활하기 힘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느냐!”라고 넌지시 책망을 실어 되물어온다. 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나도 겨울이 추운 사람인데! 그래! 추워도 난 겨울이 좋다. 어릴 때 단독주택은 창호지 1장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난방시설이니 바깥이 추우면 방도 얼마나 추웠겠나? 옛날 우리들의 집은 단열도 제대로 되지 않는 가옥구조이다. 외풍이 심하여 방 안에 앉아있으면 추운 느낌이 그대로 온다. 


광안리 여름 장사에서 긴 장마로 폭망하고 그대로 바닷가 빈집에 눌러앉아 겨울을 보내는 해가 있었다. 추워서 어머니가 돌을 구워 이불속에 넣고 자다가 이불솜에 불이 붙어 온 식구가 그냥 저세상으로 함께 갈 뻔했다. 깨어진 유리창에 덧댄 시멘트 부대가 바닷바람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혹한 속에 잠잘 때 '어머니 심정은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난다. 우리 형제는 잠잘 때는 이불속으로 머리를 처넣고 바깥으로는 아예 신체를 내놓지 않는다. 어릴 때 습관대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서 잠을 자니 아내가 “이불에 입김으로 때가 묻는다! 더럽다!”라고 한다. 그런 자세로 자도 어머니는 한 번도 이불을 더럽힌다고 힐책한 적이 없다. 문득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아들이 교도소 담장 안으로 수감되면 어머니는 교도소를 향해 다가오고 아내는 교도소에서 멀어져 간다'라는 부분을 읽고 울었다. 어머니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낸 신영복 선생의 표현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12월 한 장 남아 달랑거리는 달력을 보면 올해도 끝이다. 통행금지와 함께 온갖 규제를 받고 생활하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연말과 크리스마스에만 통금을 해제하였다.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주고받으며 한 해가 마지막 가는 느낌과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으로 12월이 들썩거린다. 어릴 때 12월은 보낼 곳이 꼭 없더라도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교회는 가지도 않으면서 크리스마스를 즐길 준비를 한다. 짝이 없는 사람도 이때쯤에는 짝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음반 가게에서 징글벨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흘러나오고 남포동 입구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조명이 켜지면 겨울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밤이 없는 지금은 그런 흥청거림의 분위기도 많이 차분해졌다.

그래도 볼에 와닿는 12월의 청량한 겨울바람은 여전히 좋다. 

한껏 껴입은 옷에 주머니가 많아서 좋다.

겨울은 이제 한창이다. 



[#10.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나는 12월이 좋다. https://brunch.co.kr/@ddbee/50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열두 달, 한 조각 https://brunch.co.kr/@ddbee/49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매직아워를 퇴근길에 만나는 기쁨 https://brunch.co.kr/@ddbee/48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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