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열두 달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은
[땡비] #10.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
해뜨기 직전이나 해가 지기 직전의 짧은 시간대를 '매직아워(Magic Hour)'라고 한다. 촬영에 필요한 빛은 충분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광이 낭만적인 효과를 내는 찰나의 시간대를 의미한다. 하늘이 검은색으로 깜깜해지면 너무 대조가 강하여 부담스러운 사진이 된다. 하늘에 아직 푸른색이 남아있으면서도 햇빛이 분홍빛으로 퍼져 점점 음영을 그리는 모습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하늘은 청색이고 그림자는 길어지지만 사진 속 피사체는 충분히 또렷이 찍힌다.
해 질 녘이 되면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힘이 난다. 특히나 겨울 동안 새까만 밤하늘에 익숙해져 있다가, 해가 길어져 퇴근길에 분홍빛 하늘을 마주할 수 있는 3월 말이 오면 기대감으로 차오른다. 하루의 끝에 조금 더 연장된 보너스 타임을 얻는 느낌이다. 어디든 더 걷고, 더 보고, 더 경험하라고 하늘에서 빛을 잠시 더 열어준 것 같다. 빛에서 기운을 얻어 자라나는 초록잎처럼,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분홍빛 하늘로부터 에너지를 듬뿍 받아 밖으로 나설 용기를 얻는다.
휴일이나 여행지에서보다 퇴근길에 매일 매직아워를 만날 때 더 행복해진다. 눈앞에 분홍빛 하늘이 펼쳐지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선선한 바람을 즐기다 보면 '행복하다'라는 말이 동동 떠오른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큰 노력 없이도 누구나 하늘만 쳐다봐도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시기다.
계절과 함께 해가 바뀐 것도 그제야 실감한다. 겨울 내내 추위를 피해 집에 있느라 가지 못했던 곳으로 가본다. 익숙했던 골목이 겨울 동안에 새로운 가게들로 바뀐 것을 보면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이 너무 정 없다 느껴져 아쉽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곳이 주는 어색함과 생동감을 즐기며 탐험한다. 하고 싶었던 것, 배우고 싶었던 것도 머리 밖으로 꺼내어 일을 벌인다. 나의 진정한 한 해는 퇴근길 분홍색 하늘과 함께 시작된다.
다시 계절이 바뀌어 출퇴근길에 깜깜해진 밤하늘을 마주하는 초겨울이 오면 나는 집토끼가 된다. 어두운 하늘을 보면 '오늘 하루는 끝!' 외치며 최대한 일찍 집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낸다. 늘 달릴 수만은 없다. 에너지를 저장하고 쉬는 시간도 필요하다.
학교를 다닐 때는 시간을 늘 생산성 있게 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 헛되이 보냈다고 후회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로 하루하루를 채운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 돌이켜보면 아니었다. 세상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내가 원한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하늘 볼 시간이고 뭐고, 계속 달리기만 하다 보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한 해 한 해가 갔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알기 위해서는 다 비워놓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파도의 파동같이 사계절과 나의 에너지 흐름은 똑 닮아 있다. 매직아워를 매일 만나는 시기에는 에너지가 차오르다가 새까만 밤이 일찍 올 때면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기를 반복한다. 밤이 긴 겨울에는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면서 집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삶을 즐긴다. 해가 길어져 퇴근길에 매직아워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때가 되면 새 계절을 즐겁게 보내려고 한다. 뚜렷한 사계절의 흐름이 있기에 매직아워도 새까만 밤도 그리 반가울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해가 길어져 따뜻해진 날에 만나는 매직아워가 그리워진다. 파도타기 하듯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시 내게 돌아올 퇴근길 분홍색 하늘과 함께 보람찬 한 해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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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열두 달, 한 조각 https://brunch.co.kr/@ddbee/49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매직아워를 퇴근길에 만나는 기쁨 https://brunch.co.kr/@ddbee/48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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