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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Dec 23. 2023

무례씨에게 (@아난)

무례함을 대하는 방법


무례씨,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무례씨는 도를 넘는 질문과 상처 주는 말을 하면서도 맑은 눈동자로 ‘무슨 문제있냐’는듯 늘 당당하게 저를 쳐다봤으니까요. 무례씨가 나타날 때마다 받아치는 일은 항상 제게 버겁고 힘들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참았어요. 그러다 한 번에 후다닥 터져버리곤 했죠. 


무례씨를 만나고 오면 자책도 많이 했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의 답을 찾기 위해 그 순간을 계속 돌려봤어요.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안 후에는 ‘그럼 왜 맞서지 못했나?'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어요. 집에 오면 당신을 너무 긁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저를 보호하는 말들이 그제야 생각났어요. ‘다음에는 꼭 이렇게 받아쳐야지’ 하면서도 사실 그 말을 할 기회는 잘 오지 않았어요. 당신을 마주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막혀하길 반복했죠. 


당신은 참 여러 얼굴을 하고 나타났어요. 때로는 먼 사람으로, 어떤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로 찾아왔어요. 무례씨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타날 때는 당신이 아픈 거라 치부하고 넘겼어요. 처음 회사에 왔을 때 무례씨는 한둘이 아니었어요. 밑도 끝도 없이 ‘네가 어느 대학을 나왔지?’라고 물어댔어요. 너무 많은 무례씨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밥을 먹다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물어보니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실례가 아닌 건지 내가 예민한 건가 생각했죠. 


제게 중요하지 않은 무례씨와는 거리감을 만들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요. 당신이 우리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신호를 보내주는 것 같았어요. 큰 의미 없는 관계니 여유가 생겨 맞받아칠 수 있었어요. 그런 나를 보고 무례씨가 욕을 해도 괜찮아요. 저도 당신의 무례함을 이미 욕하고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무례씨의 말은 지나가는 먼지와 같아서 새겨듣지 않아요. 무례씨와 함께할 때 제가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에 묵묵히 집중하면 돼요. 당신과의 관계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게 더 중요하거든요. 


문제는 무례씨가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을 때였어요. 서로 애써주던 가까운 관계라 생각했는데 친구나 연인의 얼굴을 한 무례씨를 만났을 때 내 안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어요. 나의 어떤 면이 무례씨를 불러낸 건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과거의 추억, 무례씨의 좋았던 부분, 온갖 시간 여행까지 하면서 곁에 붙잡아두려고 했어요. 소중한 사이라 더 어려웠어요. 잃을까 봐 두렵고, 당신과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기 힘드니까요. 솔직하게 섭섭함을 말해보기도 하고, 말없이 서서히 무례씨와 끝내 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어떤 식이든 마음에 당신이 너무 오래 남았습니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을 끊어낸다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러나 무례씨가 나타나는 건 가까웠던 관계에 사망선고가 하나씩 던져지는 거예요. 점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에요. 특히 오랜 친구였던 무례씨와 끝내는 과정에서 당신은 오랫동안 꿈에 나왔어요. 눈뜨면 한동안 멍하니 과거로 돌아갔어요. 당신을 찾아가 다시 잘해보자고 해야하는지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무례씨와 저는 언제든 끝날 관계였다 생각해요. 제 말에 당신이 변하길 바라는 것도 무리죠. 그렇다고 무례씨를 견딜 만큼 당신에게 맞추기에는 제가 상처투성이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먼지 같은 사람으로 두기로 한 제 선택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다 생각하고 돌아서요. 


앞으로도 무례씨를 어디서든 만나겠죠. 그럴 때마다 당신의 무례함에 제 마음이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써요. 무례함을 정의하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제게 달린 거니까요. 당신을 만난 건 교통사고 같은 거예요. 그 자리에 제가 있어서 사고가 난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난 거죠.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여러 얼굴의 무례씨를 만나면서 저는 한층 더 여유롭고 단단해졌어요. 당신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나타날 때마다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당신이 의미 있다 생각해요. 다시 만나면 심장이 또 빨리 뛰겠지만 먼지가 된 당신을 바라보며 이야기해볼게요. 그럼 안녕! 


[#9. 무례함을 대하는 방법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무례함에 대하여 https://brunch.co.kr/@ddbee/47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무례함의 반대말 https://brunch.co.kr/@ddbee/46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무례씨에게 https://brunch.co.kr/@ddbee/45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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