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례함을 대하는 방법
해바라기를 사랑하는 화가가 있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해바라기는 캔버스를 채우게 하는 최고의 물상이었다. 그는 화가들끼리 마을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예술촌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시골로 내려가서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찰나에 동료 화가와 동거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와의 인연을 이어준 것도 해바라기였다. 해바라기를 그린 그의 작품을 보고 동료는 인정의 말을 건넸고 그때 그는 드디어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자신의 집으로 오기로 한 날을 기다리면서 그는 친구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채워갔다. 그 시간은 아마 자기를 알아주는 이 하나 없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희망찬 시간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친구가 내려왔고 기대했던 동거 생활은 2개월 만에 끝이 났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와의 동거를 친구에게 제안한 것은 그의 동생이었다. 혼자 사는 형이 마음에 걸려 그의 동생은 형의 친구에게 생활비를 대 줄 테니 형과 함께 지내보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가난한 화가였던 친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친구가 화폭에 그를 담아주었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 캔버스 속에 있었다. 해바라기는 다 시들었고 그림을 그리는 인물의 눈은 풀려있었다. 코는 빨갛게 색칠하여 꼭 술 취한 사람 같았다. 그는 친구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에 분개했다. 싸움이 일어났고 그는 친구의 머리 위로 술을 뿌렸다. 모욕감을 느낀 친구는 짐을 싸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버렸다. 그 이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신문에 실렸다. 홀로 남겨진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가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랐다는 기사였다. 이것은 고흐와 고갱의 일화이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랐던 고흐는 자신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는 고갱을 이상화시켰고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마음을 다 줬던 상대에게서 돌려받은 것은 무례함이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조롱하는 고갱의 무례함에 고흐는 관계와 소통에 대한 의지의 불씨를 꺼버렸다. 무례함은 예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예의라고 하는 개념이 묘하다. 그것은 선악의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 아니다. 선한 사람이라도 예의가 없을 수 있고 악한 사람이라도 예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와의 관계를 지속시킬 의사가 있다면 관계에 진심인 쪽은 예의를 지키기 마련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혼자서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기대면서 사람은 나름대로의 관계망을 형성해 나간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발을 담그는 것이 관계이기에 관계를 맺으면 분쟁도 함께 뒤따른다. 때문에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최후의 보루를 만들어 놓는다. 그것이 '예의'이다. 예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의를 지킨다고 해서 관계가 공고해진다고 장담할 순 없다. 그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예의보다 더 강력한 요인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실리일 수도 있고 정서적인 지지나 신뢰, 애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의를 지키지 않고 선을 넘어버린다면 그 관계는 깨져버린다. 예의는 관계에서 촉매제로서 기능할 순 없지만 기본 시작점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림으로 상대를 조롱한 고갱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갱의 머리 위로 술을 뿌려댄 고흐도, 그 최소한 선을 넘어버렸고 결국 둘은 함께할 수 없었다.
추측하건대, 고흐도 고갱도 모멸감에 압도되어 관계를 바라볼 힘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고갱은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돈을 받고 고흐를 찾았다. 출발부터가 이미 일그러져버렸다. 만약 고갱이 온전히 고흐에 대한 우정만으로 고흐와 함께 살았다면 고갱이 화폭에 담은 고흐의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고갱의 무례함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기저에는 생활의 막막함으로 인해 돈에 굴복하였다는 모멸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고흐도 마찬가지이다. 잠깐 스치듯 건네준 고갱의 인정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 고흐는 자기가 기대하는 모습으로만, 보고 싶은 모습으로만 고갱을 보고 그를 기다린다. 자신을 조롱하는 고갱의 태도에서 9개월간 해바라기를 그리며 고갱의 방을 꾸며왔던 자신의 애정이 배신당했다고 생각을 한다. 고갱의 무례함을 고흐는 고갱의 머리에 술을 뿌리는 또 다른 무례함으로 갚아준다. 그리고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모멸감에 복수하듯 자신의 귀를 잘라낸다. 두 사람 다 자기를 잃어 휘청거리다 상대를, 관계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무수한 무례함을 겪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무례함에 상처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무례함으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무례함은 상처가 되고 관계는 단절된다. 그렇다면 무례함의 반대말은 예의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례함의 반대말은 다정함이다. 다정(多情)은 감정이 많은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은 상태를 말한다.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례함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 또는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말 너머 자리 잡고 있는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의 주체를 알아주면 된다. ‘아, 그래서 네가(또는 내가) 무례했구나.’ 그 실마리가 풀리면 이후에는 그저 무례함을 수습해 가면 된다. 사과를 하든 무시를 하든 그냥 넘겨버리든… 견딜 수 없는 모멸감도 근본을 파고 들여다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내가 느끼는 모멸감도, 모멸감을 준 대상도 한 수 아래로 보고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은, 감정은 다 사소하기 마련이니까.
며칠 전, 초등학생인 딸아이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3명의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우리 집 아이를 포함하여 두 명은 꿈이 제빵사로 같았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 꿈이 없다고 했다. 같이 꿈을 이뤄서 빵집을 차리자는 두 명의 친구에게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꿈은 자꾸 바뀐대. 어릴 때는 꿈이 같아도 결국은 다른 일을 한대. 그러니 너희 같이 빵집 못 차려.”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 집 아이가 말한다.
”그렇지. 근데 지금은 내가 그렇다고. “
저녁 시간이 되어 다들 집으로 돌아간 직후, 같이 제빵사를 꿈꾸는 아이 친구에게서 따로 전화가 왔다. 꿈이 달라질 순 있겠지만 지금 같은 꿈을 꾸는 걸 기억할 수 있게 종이에 우리의 꿈을 적어보자고 말한다. 무안을 주는 친구의 말에 서운함이 들었지만 무례함에 휘둘리지 않고 따로 전화를 걸어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사건을 수습해 가는 그 친구의 마음이 참 예쁘다. 아이가 전화를 끊자 어른이 되면 빵집을 같이 못 차린다고 말하던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냐고 넌지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우리 둘만 꿈이 같으니 질투가 났나 봐.’라고 답한다. 그 말을 듣는데 ‘너도 마음을 살필 힘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빙긋 웃음이 났다. 아이도, 아이 곁에 있는 사람들도 다정한 이들이면 좋겠다. 글을 쓰다 보니 아이에게 못 다해준 말이 생각난다. 글을 마무리짓고 나면 아이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
연서야, 자기만 꿈이 달라 속상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빵집 차리면 자주 놀러 와. 네가 좋아하는 빵 많이 만들어 놓을게. 너 무슨 빵 좋아해?"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무례함에 대하여 https://brunch.co.kr/@ddbee/47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무례함의 반대말 https://brunch.co.kr/@ddbee/46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무례씨에게 https://brunch.co.kr/@ddbee/45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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