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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May 17. 2024

학급 도난 사건(by. 흔희)

#18. 억울함에 대하여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은 시기였다. 학교에 아이들은 모둠학습을 할 수도 없었고 짝을 지어 앉을 수도 없었다. 5열 6석의 시험대형으로 한 줄씩 앉은 아이들은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온전히 볼 수도 없었으며 쉬는 시간에 자유롭게 모여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관계는 망가져가고 파편화되어 가는 학교 현장이었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학급의 아이들이 관계를 잘 맺어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서로의 성향을 알아가는 학급 행사를 기획했고 행사에 성실히 참여한 학생들에게 상품으로 문화상품권을 주었다. 성실함이 다른 친구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의도에서 상장을 주듯이 아침 조례 시간에 교탁 앞에서 상품권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문제는 3교시 직후에 벌어졌다. 2교시가 이동수업이라서 교실이 비워진 사이에 누군가가 아이들의 상품권을 가져간 것이었다. 침울한 얼굴을 하고 아이들이 교무실로 내려와 도난 사건의 정황을 나에게 일러주었다. 학급 내 행사였고 상품권을 가지고 있는 학생도 반 안에서만 공유되었기 때문에 상품권을 훔쳐간 사람은 학급 내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감하였다.


도난 사건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또 한 명의 아이가 교무실로 숨 가쁘게 달려와 반에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교실로 올라가니 한 아이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반 아이들이 자신을 도둑으로 의심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아이는 이동수업 시간에 화장실을 가고 싶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것이 의심의 빌미가 되었다. 평소에 지각이 잦고 주위가 산만하여 선생님께 자주 꾸지람을 듣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하여 주변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덩치가 작아 아이들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였다. 흥분한 아이를 데리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아이의 눈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아이는 테이블로 향하다가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고는 다른 의자에 앉아 고개를 처박고 엎드리더니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울부짖듯이 울음을 토해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억울하다’였다.


진실은 알 수 없다. 그 아이가 화장실을 핑계로 빈 교실로 들어와 급우들의 가방을 뒤져 상품권을 가져갔을 수도 있다. 또는 정말로 화장실을 다녀왔을 수도 있다. 정황만 있지 확증이 없기 때문에 의심은 그저 의심일 뿐 사실이 아니다. 다만 친구들이 자신을 의심하는 말들에 아이가 보인 반응이 연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동 수업 중에 특별실에서 자리를 잠깐 비웠다는 이유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상황이 억울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평소에 품행이 단정치 않았던 그간의 이미지가 프레임으로 덧대어져 아이들이 정황을 사실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학급 아이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그래서 성가신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학급 아이들은 의심의 마음을 그 아이에게 쉬이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급우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면 그렇게 의심하는 말을 대놓고 내뱉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함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로 정의되고 있다. 비슷한 말로는 ‘울분하다, 원통하다, 분하다’가 있다. 억울함은 약자의 감정이다. 지위가 높거나 공동체에서 다수에 속해 있는 사람은 분하고 답답할 정도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드물다. 합리적이지 못한 처우는 반대의 급부에 있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의 억울함은 성가시고 분란을 만드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공동체는 소수의 억울함이 주는 불편함을 외면한다. 그리고 억울함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희생양이 된다. 공동체는 희생양을 분출구로 만들어 그간에 쌓여 있던 공동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희생양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과정에서 공동체 대다수의 구성원은 동질감을 느끼고 하나로 뭉쳐진다. 표출된 분노가 수그러들면 공동체는 다시 평온을 회복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 속에서 마녀사냥, 나치즘, 난징대학살과 같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또한 학교, 직장, 정치 등 셋 이상이 모여 집단을 형성한 곳에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야만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맥이 이어져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도난 사건이 일어난 그날, 내가 목격한 것도 학급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희생양 찾기였다. 코로나로 인해 경직되었던 학급의 분위기는 위태로웠다. 아이들은 날카로웠고 스트레스는 점점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파편화되어 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아이들의 불안이나 압박, 분노감은 도난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표출되었고 그것은 하나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교실 앞문과 뒷문을 잠가 아이들을 가두어 두고 소지품 검사를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생활하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감옥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내가 경찰이 아닌 이상 범인을 색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방법은 식상하지만 양심에 호소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종례 시간에 교탁에 서서 아이들에게 눈을 감아라고 한 뒤 말을 시작하였다.


“산다는 건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르게 했던 선택들이 쌓여 너희가 스스로를 자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정황만으로 함부로 누군가를 의심할 순 없는 거다. 너무 쉽게 누군가를 의심했던 사람들은 그 의심이 어떤 마음에서 시작되었는지 한 번 살펴보길 바란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그 의심은 거두길 바란다.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옭아매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상품권을 가져간 누군가에게 말한다. 만 오천 원에 나에 대한 자부심을 팔아버리지 않길 바란다. 소지품 검사를 할까 했지만 모두를 의심하고 싶진 않다. 순간의 충동에 잘못된 선택을 했던 우리 반의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실수를 바로 잡고 자기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길 바란다. 들키지 않고 넘어가더라도 자신은 알고 있지 않니. 내가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이대로 우리는 조용히 눈을 뜨고 교실을 나갈 것이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교실에 누군가는 돌아와 학급 비품함에 가져갔던 상품권을 돌려놓길 바란다. 상품권이 돌아오면 따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교실을 나가면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오늘 이 일로 인해 우리 반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이 누구였을지.”


상품권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에 상품권을 훔쳐갔던 아이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줬던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편해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괜히 상처받기가 싫어 다음날 조례시간에 학급비품함을 열어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전달사항을 학급에 안내하고 교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반장이 큰 소리를 나를 불러 세운다.

“선생님, 비품함에 상품권이 있어요!! "

교실로 들어가 확인을 해보니 상품권을 쥔 반장 주변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봐라. 내 아니라고 했다이가.”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흥분을 뒤덮는다. 시끌벅적하던 교실에 순간 정적이 감돈다. 누가 상품권을 돌려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도둑으로 몰렸던 아이에 대한 의심을 반 아이들이 거두어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웃으며 한마디 건넨 후 교실 문을 닫았다.

“상품권은 돌아왔고 이제 나머지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나. 조용해지는 거 보니 느그도 뭐 해야 되는지 아는 것 같은데. 알면 해야지.”

잔혹하게만 느껴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어 본다.


너희들은 자라 푸르디푸른 청년이 되겠지. 청년이 되어 마주한 세상은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은 공동체이길 바란다. 상품권을 돌려놓는 용기를 낸 마음, 억울함을 항변하는 목소리에 만들어졌던 순간의 정적들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우리의 세상도 바라는 모습이 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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