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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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업무에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일을 하다가도 해야 하는 또 다른 일이 떠오른다. 신경이 그쪽으로 번져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보면 동료에게서 또 다른 업무에 협조해 달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하던 일을 멈추고 메시지를 따라 일을 하다 보면 정작 내가 원래 하고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우스워 허탈한 웃음을 지으니 옆에서 부장이 왜 그렇게 웃냐고 묻는다.
“부장님, 요즘은 일에 집중이 잘 안 되네요. 이것 하다가 멈추고 다른 것 하다가 또 멈추고…”
“자기가 일이 많아서 그래. 신경 쓸 것도 많고…”
부장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료 교사가 말을 건넨다.
“사실 나는 나이가 드니 다른 사람이랑 말을 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이어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며 들어. 그러다 보니 대화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해.”
그녀는 60대로 올해 명예퇴직을 신청하였다.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자신의 엄마가 식당을 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늘 있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회사원이거나 공무원이라 차분하고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친구들의 생활이 그저 부러웠다고 했다. 그녀는 식당에서 울려 퍼지는 트로트 음악을 배경으로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는 손님들로 기억되는 유년의 풍경을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을 써왔다고 한다. 무엇하나 정돈되지 않고 흐트러진 곳에서 그녀는 자신도 저들처럼 늙게 될까 봐 두려워했고 내 안에 없는 교양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릴까 봐 늘 긴장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책을 읽었고 공부를 했다. 주변에 배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늘 책 속의 세계를 탐구했고 배웠다. 그렇게 조금씩 그녀에게 주어진 풍경 속의 한계를 넓혀가다 보니 30대가 지나고 나서는 자기 안에서 움트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담담하게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세상이 떠들썩할 때, 소설 ‘채식주의자’의 번역본을 주문하여 모국어를 아름답게 번역했다는 영어 문장들을 살펴보고 싶어 하던 그녀였다. 그녀는 한 학년당 200명이 훌쩍 넘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선생님이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이 먼저 선생님의 자리에 와 선생님의 수업 자료들을 받아 교실로 간다. 봉사 시간을 받는 도우미도 아니었고 상점을 바라고 찾아온 아이들도 아니었다. 그냥 그 선생님이 좋아서 선생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이었다. 40년을 훌쩍 넘는 시간의 간극이 사제간의 정으로 채워지는 순간을 주변에서 틈틈이 목격해 왔다. 세상에 걱정이라곤 없는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그녀에게서 자신이 맞서왔던 과거의 한 순간들을 전해 들었다. 약점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태도에서 이미 그녀의 과거는 극복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나도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대니얼 카너먼은 자아를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로 나눈다. 세상은 온갖 감각들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보고 겪고 느끼며 맛본다. 인간의 뇌는 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험하는 자아’가 겪은 그 모든 사실을 머릿속에 다 담을 수 없다. 이때 '기억하는 자아'가 경험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여 재구성한다. 어떤 경험은 사소하여 실제보다 축소되기도 하고 어떤 경험은 유의미한 것으로 분류되어 강렬한 기억으로 저장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물리적인 환경은 통제하지 못하지만 무엇을 기억할 것이냐는 오로지 나의 선택이다. 기억을 재구성하는 편집권은 나에게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이 내가 겪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를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겪은 사건에 좌절의 의미를 부여할지, 극복의 의미를 부여할지는 오로지 나의 몫이다. 겪고 있는 현재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매 순간의 선택지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현재는 과거가 되고 지나간 과거에는 나름의 의미가 붙는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좌절이 될 수도 있고 극복이 될 수도 있고 찰나의 행복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극복된 경험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잘 가꾸는 삶을 살고 싶다.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나로 인해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어떤 상처를 받는지. 당장은 알게 되면 힘든 사실이겠지만 최대한 그 아픔에 직면해 보려 애쓴다. 직면하여 모난 나의 부분들을 다른 모양으로 다듬어 보려 한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등장인물인 염창희의 대사 중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이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꾹 다시 밀어 넣게 되는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 내가 이걸 삼키다니 자기한테 반하면서. 아, 나 또 반한다."
나는 ‘내가 이걸 하다니!’란 생각이 드는 순간을 쌓아가는 인간이 되고 싶다. 내가 나에게 반하는 순간을 쌓아가고 싶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나는 내 인생에 행복이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결국 나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행복한 인간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행복이란 나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인가 보다. 아, 나 또 반한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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