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이어리 하나를 샀습니다.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를 하는 과정 중의 하나가 이처럼 다이어리를 구매하는 일입니다. 오래전에 일기를 쓰는 이야기를 한 번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의 동일선상에 놓인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일에 뭐 특별함이야 있겠습니까? 특별치 않은 일상의 여백을 굳이 적잖은 돈을 들여가며 쓸 필요가 있는가? 물으시면 여러분은 무어라 대답하실 생각인지요? 당사자인 저도 그다지 멋들어진 대답이 쉽게 떠오르진 않습니다. 8~90% 이상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고 할지언정, 훗날 내 기억을 더듬기 위해서라도 맘에 드는 다이어리를 고르고 고를 것입니다.
오늘은 종이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는 ‘면이 매끈한가, 글쓰기에 적당할 만큼 도톰한가?’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 도착한 소포 안 내용물 곁에서 조그만 메모지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아마 ‘자사(自社)에서 사용하는 종이의 재질’을 알려줄 심산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여섯 종류의 시필지(試筆紙)가 있습니다. 말이 시필지(試筆紙)지 사실 낙서 한 줄이라도 써볼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의 촉감으로 추측하건대 대단히 우수한 질의 종이 임에 분명 하기에 그렇습니다. 더구나 한번 손이 가면 그대로 없어질까, 두려운 마음도 한몫합니다.
문득 초등학교 때 생각이 납니다.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경제 상황이 말이 아닌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라 살림이 넉넉하든지 가난하든지 전 세계가 허덕였고 우리나라라고 뾰족한 수가 없던 시절, 학생들의 학용품까지 그 여파가 미쳤습니다. 노트의 두께가 눈에 띄게 얇아졌고 연필심은 희미하다 못해 이걸 알아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까지 왔습니다. 시험지의 질은 정말 형편없기 그지없어서 중간중간 책상 바닥이 그대로 보였고 답을 잘못 써서 지우개로 지우는 날에는 그대로 구멍이 뚫리고 이에 더 보태 지우개 길 따라 보기 싫게 찢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날을 보냈는지 아득하지만, 다행히 지금 우리나라는 잘 삽니다.
저는 노트나 메모지를 사면 먼저 만년필로 글씨를 써봅니다. 두꺼운 펜촉과 얇은 펜촉으로 써본 뒤에 뒷면을 확인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좋은 종이는 뒷면에 잉크가 번지지 않습니다. 종이의 조성(組成)이 그만큼 치밀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말고, 그냥 볼펜이나 연필로 쓰면 될 일이지, 굳이 만년필로 쓰는 이유를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내 성향을 상대방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설명해야 할 테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일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 감(感)이 좋아서입니다. 다른 건 없습니다.
이쯤 되면 펜의 품질도 좋아야 할 것이지만 그를 받쳐주는 종이의 품질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가 굳이 좋은 품질의 노트를 보며 욕심내는 첫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참 IMF의 회오리가 한국을 휩쓸 때의 일입니다. 제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성경 필사를 한번 해 봐야겠다~! 결심하고 영어 성경과 노트 몇 권을 준비했습니다. 집에 있던 만년필과 잉크도 준비하고 야심 차게 필사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게 노트 몇 권으로 해결될 사안은 아니요, 시간이 갈수록 노트의 권수가 늘어갈 무렵, 같은 회사의 같은 노트의 필기감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점점 거칠어지더니 결국은 처음 품질과 다른 노트로 마무리되었습니다. IMF의 직격탄인 셈입니다.
사람이든 제품이든 여상(如常)하다는 건 참 힘든 일이지만 지켜야 할 부분입니다. 더 힘든 건 개선하는 일이겠지요. 나쁜 거는 버리고 좋은 거는 유지하며, 배울 건 어렵더라도 잘 받아들이는 거 말입니다. 이것이 내 나이 60이 되고 100세가 되어도 내게 곱게 남아야 할 텐데 살짝 걱정되는 걸 보면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모양입니다.
오늘도 종이로 좋은 걸 배우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