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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곤 Oct 27. 2023

두 분의 외할머니

그러나 그 기억의 저편에는

(이미지출처:crowdpic.net) 우리네 할머니의 이미지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합니다만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먼 길을 가셨다는 부고(訃告)가 왔습니다. 병을 앓으신 게 아니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맞은 슬픔이었습니다. 걸어서 15분여 걸리는 외가야 맘먹으면 얼마든지 갈 일이지만 단 몇 시간 딸랑 다녀온 게 제 마지막 인사의 전부였습니다. 12남매를 두신 외할머니는 환갑도 맞지 못하시고 그렇게 우리와 곱게 작별하셨습니다. 아직도 맑고 고우셨던 외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는데 어머니는 여섯이나 되는 딸들이 엄마 얼굴 하나 닮은 애가 없다며 늘 아쉬워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생이 되고 적적해하시던 외할아버지의 곁에 새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편의상 호칭을 할머니로 하지요) 성격이 활달하셨던 할머니는 그 후로 할아버지 곁에서 아내 역할을 하다가 무슨 연유인지 몇 년이 지나 홀연히 본래의 집으로 떠나셨습니다. 외삼촌이나 엄마를 포함한 이모들은 그 이유를 아셨겠지만, 손자인 나로서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 이유에 대해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시내에서 우연히 한두 번 뵈었지만 반갑게 인사하고 손잡아 드리고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일 외에는 딱히 해드릴 게 없이 그렇게 세월만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이상한 게 뭔고 하니 어머니의 어머니보다 새 할머니가 종종 기억납니다. 아마 머리가 커서 뵌 까닭도 있겠지만 기억을 연결하는 특별함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셔서 당신 이름 자 하나도 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타지에 남기고 온 자식들에게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으시면 편지지에 봉투 하나 들고 우리 집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고는 불쑥 나에게 들이미시며 “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 봐!” 그렇게 내 옆에 앉아 찬찬히 책 읽는 엄마처럼 조용한 소리로 내용을 읊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이라야 놀랄 만한 게 없고 특별할 게 없이 그냥, 잘 있냐? 별일 없냐? 애들은 잘 크냐? 나는 걱정하지 마라. 정도입니다. 길지도 않은 편지를 다 대필(代筆)하고 나면 어디 한번 읽어 봐라. 제대로 잘 받아 썼나 보게! 하시며 나름 흡족하게 봉투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 혼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더할 말이 있지는 않을까? 힘들고 외롭고 속상한 일이 더 있는데 내 입을 통해 새어나갈까, 고민하시는 건 아닌가 말입니다.     


 외할아버지께서도 세상을 떠나신 지 제법 세월이 흘렀으니 모르긴 몰라도 할머니도 세상을 뜨셨을 테지요. 잠깐이었지만 어렵게 맺어진 인연인데 좋은 길로 가셨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드려봅니다. 시절이 어렵고 힘든 시절이어서 기회를 놓쳐서이었겠지만 오랜 세월 글 하나 모르고 지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때로는 눈뜨고도 모르는 것들, 속기도 하고 보고도 모르는 억울함을 안고 살았을 게 분명합니다. 
 
 


 내 손을 통해 전하는 편지에 과연 어떤 말을 담고 싶으셨던 걸까요? 아쉬움, 회한, 후회, 억울함은 아니었을까요? 할아버지 곁에서 그리 길지 않았지만 동아줄 같던 세월을 견디시다가 체온만 남기고 떠나신 걸 보면 차마 꺼내지 못하던 내용이 많았겠구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억울함이 온 땅의 모든 며느리나 아내들의 회한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여자이기에 받았던 설움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이나 마음의 생각을 얼마나 내뱉으며 살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눈치가 보여서, 내 얼굴로 돌아오는 침 뱉기일까? 싶어 참고 참다가 닫힌 마음이 되지는 않을까? 괜스레 혼자 걱정하는 하루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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