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곳을 지날 때면 일부러 멀찍이 돌아서 걷는다. 오늘도 음식쓰레기 봉지와 소주병, 먹다 버린 치킨이 보인다. 널려있는 라면 국물에서는 상한 냄새가 진동한다. 신발에 오물이 묻을까 봐 조심조심 걷는데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흘금흘금 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내게 못 박은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여자든 남자든 훑어보듯이 빤히 쳐다보는 행동은 불쾌하다. 기분이 상한 나는 그를 째려보며 은행나무 쪽으로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표정이 묘하다. 반가운 듯한 표정도 기분 나쁜 듯한 표정도 아니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전에 저기, 저어기 교회 다녔죠?”
느리고 어눌한 말투가 띄엄띄엄 건너왔다.
“뭐라고요?”
“혹시, 전에 저어기 교회 다녔냐구요?”
비로소 그의 말이 들어왔다.
“예, 그 교회 다녔는데요. 혹시 절 아세요?”
“가까이 보니께 확실히 맞구만요.”
그제야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믿음 좋은 그의 부인과 함께. 정작 나는 그의 이름이며 사는 곳조차 모른다. 그러나 늘 미소를 달고 다니던 그의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를 먼저 알아보고 웃는 그 얼굴처럼.
그 부부는 늘 허름한 옷에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다녔다. 보는 사람마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곤 했다. 일상적인 눈인사와 다른 미소였다. 처음 찾아간 교회에서 그를 보고 전도사나 장로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그의 웃음 띤 인사는 성도 누구에게나 동일했다. 그들은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다만 그들의 경제적 형편이 헌금조차 할 만한 처지가 아닌 듯했다. 세속화되는 교회에서 그들은 변방으로 자연스럽게 몰렸다. 중요한 자리에서 그들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렇게 같은 교회 성도인 듯 아닌 듯 다니다가 교회 문제로 우리는 그곳에서 먼저 나오게 되었다.
“이 근방에 살지요?”
“예, 요기 아파트에 살아요.”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나는 내가 사는 아파트를 가리켰다. 그는 아파트 쪽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또 웃었다. 그 미소에 경계를 쳤던 내 마음이 풀리며 그의 딸까지 스치듯 기억났다. 안부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라서 오래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연신 건네고 어쩔 수 없이 가던 길을 재촉했다.
조금 걷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은행나무 밑을 청소 중이다. 쓰레기를 치우면서도 찡그린 표정 하나 없는 편안한 얼굴이다. 밝은 연두색 옷을 입어서일까. 미소 때문일까. 함부로 버린 물건들이 더럽고 지저분해도 그의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표정이 멀리서도 도드라져 보였다. 세월은 공평하게 그의 얼굴에도 굵은 주름을 여기저기 새겨놓았다.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패었다. 그런데도 그 미소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검버섯이 자라고 주름이 자리 잡아도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다.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양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찮게 보일는지, 그래도 은행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인자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저자 우종영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라는 책에서 은행나무를 이렇게 표현한다. 깜짝 놀랐다. 우리 골목길 풍경을 꼭 보고 말하는 것처럼 나무와 사람들의 모습이 흡사했기 때문이다. 몇천 년씩을 사는 게 예사라는 은행나무. 나무 시선으로 쳐다보면 들어온 지 10년도 안 된 사람들이 기본 도덕이나 윤리도 모르고 주인 행세까지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들과 별반 다르지도 않으면서 쓰레기 버린 손을 비아냥거리던 내 모습 또한 얼마나 하찮았을까. 그나마 손상된 품위를 회복시키는 그의 손길이 분주해서 다행이다.
보이는 건 그의 등뿐이다. 은행나무가 변함없이 버틴 것처럼 그의 트레이드마크도 한결같다. 그가 전한 미소 덕분에 약속 길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오랜만에 입 주위가 풀리며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