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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닌데, 나에겐 특별한 일

by 은진 Mar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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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흩어진 장작 서너 개를 먼저 주워 모았다. 불쏘시개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지만, 신문지 한 장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궁이를 사용한 지 오래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다행히 빨간 성냥갑이 부뚜막 한쪽에 놓여 있었다.


솔잎이 소나무 밑에 수북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걸 보니, 이제 불쏘시개 걱정은 없을 듯하다. 두 팔 가득 안아 온 솔잎을 아궁이에 넣었다. 그런데 성냥개비가 자꾸 부러졌다. 예전 같으면 한 번에 붙었을 불이 쉽사리 붙지 않았다. 눅눅해진 것을 버리고, 네 번째 시도 후에 불이 붙었다.


치이익— 주홍 불꽃이 닿자마자 솔잎은 자기 몸을 불사르며 타올랐다. 그 순간, 뜨거운 기운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불길이 얼굴을 스칠 듯 튀어 올랐다. 다행히 화상을 입진 않았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조심스럽게 불이 잘 붙도록 솔가지와 장작을 쇠막대기로 헤집었다. 타다닥 경쾌하게 울리는 장작 타는 소리. 불은 춤을 추듯 일렁거리며, 동굴 같은 아궁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뜨거운 온기가 고래를 타고 돌아다니며 구들장을 데울 것이다.


시골 부엌을 어떻게 할지 두고 남편과 나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다. 그래도 걱정을 안 했다. 남편은 매일 나와 붙어 다닐 만큼 생각이 잘 맞는 친구 같은 사람이다. 아무리 티격태격 의견이 갈려도 적당하면 들어줄 거라고 여겼다. 이심전심일 거라고. 하지만 둘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내심 당황했다.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상대의 속마음은 잘 몰랐다.


남편이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그을음 봐. 50년도 넘었을걸. 천장도 벽도 까맣게 변했잖아. 연기가 벽틈으로 스며들면 옷에서도 불냄새가 배일 거야. 요즘 누가 이런 걸 사용해?”


나는 손에 묻은 재를 툭툭 털며 맞받아쳤다. “아궁이랑 굴뚝을 없애자고? 잘 생각해 봐. 장작만 있으면 난방이 되는데, 기름값이 폭등하는 요즘엔 이게 더 경제적이야. 그리고…”


말을 멈췄다. 불을 지피는 일, 그건 단순히 난방 문제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일이었고, 불을 바라볼 때면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찾아왔다. 어쩌면 내게는 저절로 굴러온 기회였다. 수리비로 잡은 예산이 거의 바닥이 난 것이다. 결국 부엌 수리는 보류되었고, 내 의견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불길이 안정되자, 나는 한숨을 돌리고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남편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냥 보일러 틀면 될 텐데,  굳이 이런 걸 왜 하는 거야?”

‘굳이 이런 거'라니. 한기를 이기며 일부러 불을 지폈는데, 그렇게 말하다니.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내 반응이 좀 그랬던 걸까.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예전에 큰 가마솥은 부모님이 맡았고, 작은 아궁이는 나와 동생들의 몫이었다. 부엌은 난방만이 아니라, 요즘으로 따지면 주방과 난방이 결합된 다목적 공간이었다. 부모님은 바빴고, 저녁이면 내가 불을 맡곤 했다. 마른 솔잎과 솔가지는 불이 쉽게 붙었고, 참나무는 소나무보다 화력이 좋고 연기가 적다는 것은 그때 익힌 지혜였다.


어릴 땐 그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불을 지피는 순간을 기다리고 좋아한다. 캠핑을 정기적으로 갈 정도로 즐기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캠핑 가서 고기 굽고 구경하며 노는 게 다인 줄 알았는데, 진짜 하이라이트는 불멍이더라. 보고 있으면 잡념들이 다 사라지는 느낌이었어.”


처음엔 여유로운 사람들의 사치처럼 들려서 거슬렸다. 하지만 시골에 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장작을 챙기고 불을 붙이려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멍하니 이글거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까지. 캠핑장이든 시골집이든 불 앞에서 느끼는 건 같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바닥이 따뜻해지자 남편이 중얼거렸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러더니 능청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군고구마라도 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마뜩잖아하던 남편은 결국 나보다 먼저 구들장에 몸을 뉘었다.


나도 방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바닥에 몸을 기댔다. 바닥에서 스며 나오는 온기가 천천히 온몸을 감쌌다.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시골의 겨울은 도시보다 더 깊은 고요 속에 잠긴다. 바람은 매섭고 공기는 살을 에듯 차갑다. 창을 통해 보이는 길은 지나가는 이 하나 없다. 자동차만 보여도 귀한 손님 보듯 지나갈 때까지 쳐다본다. 그대로 멈춰버린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꽃을 응시할 때처럼 시간도 생각도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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