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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Oct 09. 2023

파이팅 금지

[연재] 생명으로 우리는 귀엽다

선수가 입장한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선수는 가슴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친다. 드디어 결승전 앞에 섰다. 모든 경기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만큼은 간절하다. 목숨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아니,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저 즐기자. 그러다가 멈칫한다. 어디선가 '파이팅'하는 소리가 들린다. 즐겨서는 안 되겠다. 파이팅. 싸우러 가는 마당에 즐기다니, 즐길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와 상대에게 집중한다. 진짜 파이팅. 싸움이 그렇게 시작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과 같은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위의 경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세상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 세상 앞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들의 처지가 바로 이렇다. 늘 싸워야만 하는 우리, 그래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우리는 어느 순간 버릇처럼 파이팅을 외쳤다. 내가 파이팅에 익숙해졌던 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거의 한 달에 한 번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아침에 등교를 하자마자 친구들과 파이팅을 외쳤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가채점을 하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면서도 채점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파이팅이라 말하곤 했다. 싸우러 나가자는 외침이었다. 우리 반 친구들과 나는 경쟁자임과 동시에 함께 전장으로 나가는 동반자였고 우리는 파이팅을 외치면서 서로에게 용기를, 그리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곤 했다. 힘찬 파이팅과 다르게 결과는 참혹하기도 했고, 때로는 기쁨을 주기도 했지만 어차피 또 다른 전쟁은 늘 우리 앞에 있었기에 오늘의 결과로 일희일비할 시간도 없었다. 수능만 끝난 세상은 파이팅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이 세상에서 외치는 파이팅들은 더욱더 치열했고 때론 처절했고 때론 처참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파이팅을 습관화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파이팅의 여정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우리는 파이팅을 외친다. 만남의 순간도 헤어짐의 순간도 우리는 늘 나와 타인이 서 있는 세상 그 어디에서나 전쟁과 같은 상황은 반복된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참혹함이 언젠가는 무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었던가. 나의 냉혈한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 줄 언어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찾아 헤맨다. 그러던 어느 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늘 전쟁을 견디며 살아온 존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전쟁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주어진 세상 외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삶이었고, 그런 삶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꽤 멀리에 놓여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애써 그들의 눈빛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동물에게 다정한 법>에서는 생각하고 슬퍼할 줄 아는 존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고래는 인간에 버금가는 언어 학습 능력과 표현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해양 생물학자 루이 허먼에 따르면 큰 돌고래는  '사람을 서핑보드로 데려가라'와 '사람에게 서핑보드를 가져다줘라'를 구별해 이해했고, 그에 맞게 행동을 했습니다. 
  이런 언어 학습 능력뿐 아니라 고래는 슬픔 등의 구체적인 감정을 느끼는 동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2020년 6월, 제주 연안에서 어미 남방 큰 돌고래가 죽은 새끼를 업고 2주일 넘게 유영하는 모습이 관찰되었지요. 가까운 관계의 돌고래가 죽은 후 애도하는 이런 특이한 행위는 과거부터 종종 포착되어 있습니다. 
  고래 지능이 매우 높아 자기 인식이 가능하고 감정도 풍부합니다. 평균 지능지수가 80에 달합니다. 이른바 자의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거울실험을 통과했을 뿐 아니라 모성애, 우울증, 집단 따돌림, 집단 환각 등 보통 반응이나 본능이라 일 걷는 단순 감정 이상의 복잡한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위의 문장은 수족관 돌고래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인간이 아닌 돌고래에게서 찾았다. 수족관 안에 살고 있는 동물의 입장, 공장식 축산의 현장에서 생명으로 살아내고 있는 동물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지능과 사고, 실제적인 반응을 기준으로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다. 관점을 바꾸니 인간의 의도가 존재로 가치 있는 생명들의 삶을 속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은 파이팅이라는 단어를 외치지 않았어도 온몸으로 삶과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짊어지는 것이 삶이라는 무게라면, 우리가 견디고 있는 모든 것이 삶이라면 그들에게 삶은 무게, 또는 견디기가 가능한 그 어느 지점. 과연 어느 곳에 머물러 있었을까. 같은 곳을 맴돌며, 같은 공간 안에 살면서 온몸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자유로움과 자연의 섭리 가운에 태어난 자신의 알 수 없는 욕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겨우 인간의 세상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은 그들을 이해하기에 지혜가 너무도 짧기만 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한 복지 체계를 갖추고 편리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가는 출발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본연의 것으로 돌아가기 위한 출발일뿐이다. 그들의 파이팅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파이팅이 아니라 싸우지 않았던 상태, 태어남과 함께 주어진 본연의 존재로 돌아가기 위한 파이팅인 것이다. 


파이팅을 검색해 보면 '대한민국에서 힘내라라는 뜻'이라고 나무위키는 말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싸우자는 이 말을 일상의 언어로 쓰는 나라는 없다. 전쟁과 기근, 싸움과 갈등에 익숙한 나라.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스스로에게 때론 서로에게 싸워서 이기자, 또는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들로 서로를 위로하는 나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틀과 제도 아래에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혹여 두렵더라도 견디며 이겨낼 힘이 있다. 연약해 본 존재들은 위기에 놓인 연약한 존재들에 대하여 더 빨리,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의지가 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이기 때문에 더욱더 기대하는 바이다. 오늘도 숨죽여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자유로이 자신의 본능을 펼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을 향해 우리는 파이팅이 아닌 그들의 삶의 터전을 온전한 것으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파이팅을 뒤로하며 나는 이 글을 정리한다. 지금도 생명이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곳에서 삶과의 사투, 생과의 싸움이 아닌 온전한 생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터전이 더욱더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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